매주 일요일, 수백만 명이 교회 문을 연다.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넣고,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간다. 이 모든 것을 수십 년째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직분을 맡고, 선교헌금을 성실히 낸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마태복음 7:21-23
이 말씀을 잘 읽어보라. 그들은 교회에 앉아만 있던 사람들이 아니다. 선지자 노릇을 했고, 귀신을 쫓아냈고, 권능을 행했다. 종교적으로 대단히 활동적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응답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를 멈추어 서게 한다.
거짓 확신이라는 영적 면역
가장 위험한 병은 증상이 없는 병이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지만, 아프지 않다고 느끼면 아무도 검진을 받지 않는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나는 교회에 다니니까 괜찮다”는 확신이 가장 무서운 면역 장치가 된다. 진짜 복음이 와도 더 이상 찔리지 않는다.
한국 교회에서 이 거짓 확신은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공로적 확신이다. 새벽기도 출석, 십일조, 교회 직분 — 이런 것들이 쌓이면 은연중에 “이 정도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겠지”라는 마음이 자란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가 아니라 공로다. 바리새인의 신앙과 다르지 않다.
둘째, 경험적 확신이다. 부흥회에서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 방언을 했다, 환상을 보았다 — 이런 체험이 구원의 증거가 되는 경우다. 그러나 감정의 강도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는 “즉시 기쁨으로 받았다.” 그러나 뿌리가 없어 환난이 오자 곧 넘어졌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 마태복음 13:20-21
셋째, 사회적 확신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 — 이것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 교회의 시민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참된 회심은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참된 회심, 곧 성령에 의한 진짜 거듭남은 무엇이 다른가? 성경은 분명한 표지들을 제시한다.
죄에 대한 진실한 애통
참된 회심의 첫 번째 표지는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이다. 이것은 “들켜서 부끄러운” 수치심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더러움을 본 자의 통곡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 시편 51:17
죄 각성이 없는 결신은 거짓 평안을 심어준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을 의도적으로 피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설득력 있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고린도전서 2:3-5
감정을 조작하여 결신을 이끌어내는 방식은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도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 자체를 사랑함
두 번째 표지는 결정적이다. 참된 회심자는 그리스도의 혜택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체를 사랑한다. 천국에 가는 것, 축복을 받는 것, 문제가 해결되는 것 — 이런 부수적 혜택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그분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우심 자체에 매혹된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신앙과, 하나님 자체가 목적인 신앙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바울은 모든 종교적 성취를 배설물로 여겼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빌립보서 3:8
삶의 실질적 변화
세 번째 표지는 열매다. 참된 회심은 반드시 삶의 변화로 나타난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로마서 8:9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에게는 죄와 싸우는 삶이 시작된다.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뀐다. 죄를 사랑하던 사람이 죄를 미워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하기 시작한다. 이 변화가 없다면 — 아무리 오래 교회에 다녔어도 — 진지하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스스로를 시험하라 — 정죄가 아닌 초청
이 글의 목적은 정죄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초청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권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 고린도후서 13: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장은 참된 확신의 세 기둥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내적 은혜의 증거, 그리고 성령의 내적 증언이다. 확신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이 세 가지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견고해진다.
다음의 질문들 앞에 조용히 서 보라.
- 나는 내 죄를 알고 그것 때문에 진실하게 슬퍼한 적이 있는가?
- 나는 내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가?
- 나는 그리스도의 혜택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체를 사랑하는가?
- 나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의 열매가 있는가?
-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갈망하는가?
이 질문들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면, 절망하지 말라. 오히려 감사하라. 지금 이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일 수 있다. 거짓 확신 속에 편안한 사람은 결코 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지금이 은혜의 때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이 당신을 구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당신을 절망시켜서도 안 된다.
복음의 핵심은 이것이다. 구원은 당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빈손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는 것뿐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으신다.
지금 이 순간, 형식적 신앙의 껍데기를 벗고 진짜 질문을 던지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문은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