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전능한 신이 왜 고통을 허용하는가

전지전능한 신이 왜 고통을 허용하는가

#신정론#악의문제#섭리#고통#변증

— 과학도가 던진 질문, 성경이 펼치는 답


1. 피할 수 없는 질문

실험실에서 세포의 정교한 자기복제를 관찰하다 보면, 이 경이로운 질서 뒤에 설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관이 스칠 때가 있다. 그런데 같은 생물학이 보여주는 또 다른 현실이 있다. 암세포의 무자비한 증식, 유전 질환으로 태어나자마자 고통받는 아이,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몸. 만약 이 세계를 만든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을 허용하는가?

기원전 3세기 에피쿠로스가 정식화한 이래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강력한 반유신론 논증으로 기능해 온 문제다.

  1. 신이 전능하다면 악을 제거할 능력이 있다.
  2. 신이 전선(全善)하다면 악을 제거할 의지가 있다.
  3. 그런데 악이 존재한다.
  4. 따라서 전능하고 선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삼단논법은 날카롭고, 정직하며, 무시할 수 없다. 이 글의 목적은 이 질문을 회피하거나 감정적 위로로 덮는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정면 돌파하는 것이다.


2. 논증의 숨겨진 전제

에피쿠로스의 논증이 타당하려면 암묵적 전제 하나가 필요하다: “선한 존재는 악을 허용할 어떤 도덕적으로 충분한 이유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이 전제는 자명하지 않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이 지점을 짚는다.

“우리가 ‘신은 선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즉시 해준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과 친절을 혼동하고 있다. 사랑은 친절보다 더 엄격하고 더 빛나는 것이다.”

만약 신의 선함이 단순한 안락 제공이 아니라, 피조물을 궁극적 선으로 이끄는 목적론적 사랑이라면, 과정 중의 고통이 그 선함과 양립할 수 있다.


3. 자유의지 논증 — 그 힘과 한계

알빈 플란팅가가 정교화한 자유의지 방어의 핵심: 신이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를 창조하기로 했다면, 그 자유가 악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자유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자유에는 오용의 가능성이 내재한다.

이 논증은 도덕적 악에 대해 상당한 설명력을 갖는다. 그러나 자연적 악은? 지진, 쓰나미, 유전 질환 — 이것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무관하다. 여기서 개혁주의 신학은 더 과감한 답을 제시한다.


4. 칼뱅의 섭리론 — 신은 방관자가 아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신은 악을 단순히 ‘허용’하는 방관자가 아니라 주권적으로 통치하신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섭리란 그분이 하늘에 앉아 일어나는 일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하늘의 키를 잡고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 장 칼뱅, 기독교 강요 I.xvi.4

핵심: 신이 악을 작정하시는 목적과, 인간이 악을 행하는 동기는 전혀 다르다. 성경은 이 원리를 요셉의 입을 통해 직접 진술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창세기 50:20

형들의 행위는 악의에서 나온 였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을 통해 신은 선한 목적을 성취했다. 행위자의 도덕적 책임과 신의 섭리적 목적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정교한 균형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 측량할 수 없는 지혜, 무한하신 선하심은 그의 섭리 안에서 매우 강력하게 나타나므로, 첫 번째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모든 죄에까지 미친다. 그것은 단순한 허용이 아니라, 가장 지혜롭고 능력 있는 제한 아래에서 질서를 세우시고 다스리시되, 그분 자신의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섭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죄악 됨은 오직 피조물에게서만 나오는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장 4항

이것은 다층적 인과의 인정이다. 악의 도덕적 원인(피조물의 선택)과 섭리적 맥락(신의 궁극적 목적)은 서로 다른 층위의 설명이다.


6. 가장 어려운 질문 — “그 ‘궁극적 선’이 도대체 뭔가?”

말할 수 있는 것: 십자가의 신정론

기독교 신정론의 독특성은 여기에 있다. 기독교의 신은 고통에 대해 철학적 해설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이사야 53:3-5

고통받는 신 — 이 개념은 기독교에만 있다. 신이 고통의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라면, 고통에 대한 신의 도덕적 정당성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정직

그러나 구체적인 한 아이의 구체적인 고통이 왜 필요했는지를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한계를 인정한다.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으라 내가 네게 묻겠으니 너는 내게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 욥기 38:1-4

이것은 “닥치고 믿어라”가 아니다. 이것은 인식론적 겸손에 대한 요청이다. 우주의 기초를 놓을 때 거기 없었던 존재가, 우주적 섭리의 전체 그림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7. 로마서 8장 — 고통의 목적론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로마서 8:28

‘모든 것’에는 고통과 악도 포함된다. 바울은 악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의 섭리 아래에서 악조차도 궁극적 선을 향한 과정에 편입된다.

그리고 바울은 이 확신 위에서 선언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로마서 8:38-39

이것은 고통이 없다는 선언이 아니다. 고통이 최종적 말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8. 에피쿠로스의 삼단논법 재검토

  1. 자유의지와 도덕적 악: 사랑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자유는 오용의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수반한다.
  2. 섭리적 통치와 다층적 인과: 악의 도덕적 책임은 피조물에게 있고, 신은 이를 더 큰 선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3. 십자가의 참여적 답변: 기독교의 신은 고통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오심으로써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4. 인식론적 겸손: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섭리의 전체 그림을 요구하는 것은 과도한 요구이다.
  5. 종말론적 소망: 고통은 최종적 현실이 아니라, 피조물의 궁극적 회복을 향한 과정이다.

실험실로 돌아가며

이 글은 악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논증이 기독교 유신론에 대한 결정적 반박이 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이 이 문제에 대해 지적으로 정합적이고 존재론적으로 깊은 답변의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보였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창조의 아름다움 타락의 비극 구속의 소망을 하나의 서사 안에서 통합하는 세계관이다. 적어도 진지하게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C.S. 루이스의 말을 빌려 마무리한다.

“나는 태양이 떠올랐다는 것을 믿는다.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악의 문제는 어둡다. 그러나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우리는 그 어둠의 윤곽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윤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뜻이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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