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할 힘조차 없는 당신 곁에 앉아서
무릎 꿇을 힘이 없습니다. 입을 열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삼십 분, 한 시간도 기도했는데, 지금은 눈을 감는 것조차 버겁습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소리가 들리고, 다른 한구석에서는 “그냥 그만두자”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글은 그 자리에 있는 당신에게 씁니다. 기도를 더 하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그리고 그 자리에 누가 이미 계신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게으름과 소진은 다릅니다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기도가 귀찮아서 안 하는 것과, 기도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것은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게으름은 결핍을 느끼지 못합니다. “기도? 안 해도 별일 없잖아.” 그렇게 무감각한 것이 게으름입니다. 그러나 소진은 정반대입니다. 결핍 자체가 고통입니다. “기도해야 하는데 못하겠다”는 괴로움, “하나님이 멀게 느껴진다”는 아픔 — 이것은 게으름이 아닙니다. 이것은 갈증입니다.
그리고 갈증은,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편 기자가 이 갈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 시편 130:1
“깊은 곳”이라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산꼭대기가 아닙니다. 영적 절정이 아닙니다. 가장 낮고 어두운 바닥에서, 울부짖는 것조차 간신히 하면서, 그래도 “주께” 소리를 냈습니다. 이것이 죽은 신앙의 소리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살아 있기 때문에 나오는 신음입니다.
”기도하고 싶은데 못하겠다” — 그 탄식이 이미 기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붙잡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로마서 8:26-27
이 구절을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상황은 정확히 당신의 상황입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고, 말이 나오지 않고, 힘이 없는 바로 그 자리. 그런데 바울은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합니까?
성령이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인간의 언어로 형성되지 않는 신음, 문장이 되지 못하는 울림 — 성령께서 그것을 가지고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말을 잃었을 때, 성령은 말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기도를 멈추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도,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기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완벽한 열정이 전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얼굴을 향하는 것 자체가 기도입니다. 3분이면 3분을 드리십시오. 아무 말도 못하겠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분을 향해 앉아 있으십시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독교 강요 3권 20장에서 칼뱅은 거듭 강조합니다 —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닿기 위해서 인간 쪽의 완전한 집중이나 뜨거운 감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왜냐하면 기도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와 성령의 대신하는 간구가 기도를 기도 되게 합니다.
피로는 죄가 아닙니다 — 당신은 피조물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오랫동안 기도에 대해 이런 공식이 통용되어 왔습니다:
- 새벽기도 출석 = 신앙의 척도
- 통성기도의 강도 = 기도의 질
- 응답의 유무 = 믿음의 강도
이 공식 아래에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수행(performance)**이 됩니다. 더 오래, 더 뜨겁게, 더 간절하게 — 그래야 “제대로 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식 앞에서 지친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책감에 빠집니다. “나는 기도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98문이 기도를 정의할 때, 거기에 시간 조건이 있습니까? 감정 조건이 있습니까?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하며,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의 자비하심을 감사히 인정하는 것이다.” —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98문
소원의 크기나 열정의 온도에 대한 조건은 없습니다.
기도는 성과(performance)가 아니라 **관계(communion)**입니다. 그리고 관계에는 침묵의 시간도, 기력이 없어 기대어 앉아 있기만 하는 시간도 포함됩니다. 부부가 매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까?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아내가 옆에 앉아 손만 잡고 있는 것은 관계의 실패입니까? 그것은 관계의 가장 깊은 순간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피로는 죄가 아닙니다. 피로는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는 오래된 신학 격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유한함을 아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흙으로 지으셨고, 당신이 흙임을 기억하십니다.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심이로다.” — 시편 103:14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먼저 하신 일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영적 소진의 장면을 봅시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한 직후, 이세벨의 협박 한마디에 광야로 도망쳐 로뎀 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했습니다. 최고의 영적 절정 직후에 찾아온 최저의 나락 — 이것이 영적 소진의 전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믿음이 왜 그러냐”고 꾸짖으셨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두 번째 와서 그를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이 멀다 하니라.” — 열왕기상 19:7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먼저 주셨습니다. 설교가 아니라 밥을 주셨습니다. 교리가 아니라 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소진 앞에서 영적 처방만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몸이 무너져 있으면 몸을 먼저 돌보시는 분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 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일 수 있습니다. 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산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후퇴가 아닙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먼저 행하신 돌봄의 순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감정이 사라졌다고 뿌리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영적 소진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감정의 부재를 믿음의 부재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아요. 기도할 때 아무 감동이 없어요. 예전 같은 뜨거움이 없어요.” 그래서 결론을 내립니다 — “내 신앙이 죽었나 봐요.”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구별이 필요합니다. 느낌이 사라진 것과 뿌리가 죽은 것은 다릅니다. 겨울 나무를 보십시오. 잎이 다 떨어졌습니다. 꽃은커녕 새순도 없습니다.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뿌리는 살아 있습니다. 봄이 오면 다시 움이 틉니다.
영적 침체의 핵심은 감정이 진실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느낌이 없으니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감동이 없으니 은혜가 떠났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함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놀랍도록 단순한 처방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시편 42:5
시편 기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자기 영혼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감정이 “넌 끝났어”라고 말할 때, 의지로 진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것은 감정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감정은 흥분이 아닙니다. 뜨거운 눈물이나 전율하는 체험만이 영적 감정인 것이 아닙니다. 의지가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는 것, 그 미세한 움직임 자체가 거룩한 감정입니다. 3분간 눈을 감고 “하나님, 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 그것은 의지의 불씨입니다. 그리고 그 불씨를 지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말을 잃었을 때, 빌려 쓸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할 말이 없을 때, 가장 좋은 처방이 있습니다. 시편을 소리 내어 읽으십시오.
시편은 3천 년 전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쏟아낸 기도입니다. 기쁨도 있지만, 탄식이, 분노가, 절망이,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위해 미리 써 놓은 기도입니다.
주기도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형식적 기도는 빈 형식이 아닙니다. 말을 잃은 자를 대신하여 기도하는 그릇입니다. 당신의 말이 바닥났을 때, 교회가 2천 년간 드려온 기도의 말을 빌려 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성도의 교제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 시편 34:18
이 구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기도를 잘하는 자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강건한 자가 아닙니다. 마음이 상한 자입니다. 상한 마음, 무너진 영 —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가까이 오십니다.
설교자도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19세기 런던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습니다. 수천 명 앞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그가, 설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입을 열지 못하는 날들이 있었습니다. 기도는커녕 한마디도 할 수 없는 날들. 그는 이 경험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탄식도 기도라고.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으리이다.” — 시편 28:1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시편의 언어를 빌려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시편 22:1 (마태복음 27:46)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어둡고 처절한 순간에, 시편의 탄식을 기도로 드리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조차 그 자리에서 시편의 말을 빌려 부르짖으셨다면, 당신이 시편의 말을 빌려 신음하는 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자리를 지키되, 간절함은 만들지 마십시오. 억지로 뜨거워지려 하지 마십시오. 억지로 감동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 자리에 앉아 계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성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자리를 보십니다.
간절함은 기도의 전제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간절해야 기도할 수 있다.” 간절함이 먼저 있고, 그 간절함이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고.
그러나 성경은 순서가 다릅니다. 간절함은 기도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기도의 열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다 보면 — 처음에는 아무 감정 없이, 의무감으로, 혹은 습관으로 — 하나님이 마음을 움직이셔서 간절함을 주십니다. 기도하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것이지, 간절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탕자의 아버지와 같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누가복음 15:20
탕자가 아버지에게 간 것은 간절한 사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배가 고파서였습니다. 동기가 순수하지도, 마음이 뜨겁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직도 거리가 먼데” 달려오셨습니다. 아들의 간절함을 기다리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방향만 틀자 달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뜨거운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얼굴을 돌려 그분을 향하기만 하면 — 그것이 3분짜리 한숨이든, 말 없는 침묵이든 — 아직도 거리가 먼데 달려오시는 분입니다.
잠잠히 바라는 것 — 그것도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 시편 62:1
“잠잠히 바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뜨겁게 부르짖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잠잠히, 그분만 바라보는 것 — 그것이 기도입니다.
당신이 지금 기도할 힘이 없다면, 이것만 하십시오. 조용히 앉아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됩니다. 눈을 감고, “하나님, 저 여기 있습니다”라고 한 문장만 말하십시오. 그것조차 안 되면, 시편 23편을 소리 내어 읽으십시오. 그것조차 안 되면, 그냥 앉아 계십시오. 그분을 향한 그 자리 지킴 자체가 기도입니다.
간절함을 억지로 만들지 마십시오. 뜨거움을 흉내 내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당신의 영적 수행 능력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잘 기도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듯, 잘 기도하지 못한다고 그리스도인이기를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황무지의 시간은 하나님이 은사나 체험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붙잡게 하시려는 훈련일 수 있습니다. 감동이 사라지고, 체험이 마르고, 느낌이 없어진 그 자리에서 — 그래도 하나님을 향해 앉아 있는 것. 그것이 가장 깊은 신앙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 시편 34:18
지금, 그분이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당신의 상한 마음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