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우리는 “나 못 하겠다”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옵니다. 기도를 멈춘 지 꽤 됐는데 —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뭔가 잃은 건가요? 하나님이 떠나신 건가요? 아니면 사실 별일 없는 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둘 다 맞고 둘 다 틀립니다.
끊긴 것과 끊기지 않은 것
여기서 하나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신학은 이것을 연합(union)과 교제(communion)라는 두 단어로 나눕니다. 어렵게 들리지만 실은 단순합니다.
연합은 존재론적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기도를 멈추든, 교회를 쉬든, 심지어 한동안 하나님을 잊고 살든 —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끊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기도 성적표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붙드심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나의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요한복음 10:28-29
기도를 멈춘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교제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교제는 그 연합을 실제로 누리는 것, 맛보는 것, 느끼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법적으로 여전히 부부이지만 대화를 끊고 각방을 쓰면 — 결혼은 유효하지만 결혼의 기쁨은 사라집니다. 연합은 있되 교제가 없는 상태. 기도를 오래 멈춘 삶이 정확히 그 모양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잃는가
“기도 안 하면 벌 받는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한동안 쉬면 어딘가에서 벼락이 떨어질 것 같은 불안이 옵니다. 먼저 이것을 분명히 해둡시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바치는 공로가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점수가 올라가고, 적게 한다고 벌점을 받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기도를 의무와 공로의 틀 안에 가두는 순간, 복음은 율법으로 변질됩니다.
그렇다면 잃는 것이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벌이 아니라 빈곤화가 일어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늘의 공급이 멈춥니다. 야고보서에는 놀라울 만큼 단순한 진단이 나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 야고보서 4:2b
기도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전달하시는 통로 중 하나입니다. 수도꼭지를 잠그면 수원지의 물이 마른 것은 아니지만, 내 컵은 비게 됩니다. 기도를 멈추면 하나님이 변하신 게 아닙니다. 다만 은혜를 퍼 올리는 도구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둘째, 내면의 저항력이 약해집니다.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로마서 8:13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그 능력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기도 없이 지내면 — 갑자기 큰 죄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 서서히 내면의 죄에 대한 민감성이 무뎌집니다. 예전에는 찔렸던 것이 이제는 괜찮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셋째,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닫힙니다. 이것이 어쩌면 가장 큰 손실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 시편 16:8
“항상 내 앞에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 의식을 깨어 있게 하는 영적 감각 기관입니다. 기도 없이 오래 지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됩니다. 일몰을 보아도 감동이 없고, 말씀을 읽어도 글자만 보이고, 찬양을 들어도 멜로디만 들립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지하는 내 영의 눈이 닫힌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 이사야 59:1-2
하나님의 손이 짧아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귀가 멀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사이에 무언가가 쌓인 것입니다.
”근데 나는 기도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요”
여기서 잠깐 멈추겠습니다. 위의 이야기를 읽고 “결국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나는 지금 그게 안 된다니까”라고 느끼신다면 — 맞습니다. 그 감정은 정당합니다. 3편에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기억해주세요. 기도할 힘이 없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기도만이 하나님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가 아닙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은혜의 수단(media gratiae)을 셋으로 봅니다: 말씀, 성례, 기도. 여기에 더해 성도의 교제도 은혜의 통로입니다. 기도가 막혀 있는 시기에도 — 주일에 앉아서 설교 말씀을 듣는 것, 성찬에 참여하는 것, 옆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 — 이 모든 것이 은혜의 통로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빌립보서 4:6-7
이 구절을 지금 당장 실천하라는 압박으로 읽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렇게 읽으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약속으로. 당신이 기도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공동체의 기도가, 말씀이, 성례가 당신의 마른 영혼에 물을 대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때에 찾아오신 하나님
성경에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곱.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훔치고, 도망치던 사람.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잠들었습니다.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쳐서 쓰러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 창세기 28:15
야곱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찾으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밤에, 도망치는 발길 위에, 돌베개 위에 쓰러진 사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요한복음 14:18
기도를 멈춘 당신을 하나님이 고아처럼 버려두셨을까요? 아닙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나이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피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나이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시편 139:1-4
당신이 침묵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앉음과 일어섬을, 당신의 생각을, 당신의 모든 길을, 심지어 혀에 올리지 않은 말까지 아십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당신의 침묵도 하나님은 읽고 계십니다.
어떻게 돌아오는가
교회사를 보면, 영적 건조함에서 회복되는 경로는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위기입니다. 삶이 무너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부르게 됩니다. 기도를 잊고 살던 사람이 병상에서, 상실 앞에서, 절벽 끝에서 “하나님”을 다시 부릅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내가 누워 잠이 들었다가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 시편 3:4-5
다른 하나는 조용한 각성입니다. 어느 날 문득 — 설교 한 마디에, 찬양 한 소절에, 아이의 기도 한 줄에 — “나는 하나님 없이 살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옵니다. 이것은 당신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개입입니다.
역사적으로 큰 부흥은 거의 언제나 긴 건조함 뒤에 왔습니다. 개인의 영적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건조함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마른 뼈에도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 은혜의 보좌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히브리서 4:16
“담대히”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오랫동안 기도하지 않았으니 조심스럽게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워하며 뒷문으로 들어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담대히 오라고 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보좌입니다.
죄책감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이 글을 읽고 “그래, 기도해야지” 하고 이를 악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기도로 돌아오는 힘은 의무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 안 하면 벌 받는다”는 두려움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단 하나, 내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요한일서 4:19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첫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마태복음 6:9
“전능하신 심판자여”가 아닙니다. “무서운 왕이여”가 아닙니다. 아버지. 기도는 의무 이행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오래 연락하지 않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거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전화기를 들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전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셨은즉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 시편 27:8
“내 얼굴을 찾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이리 와”라고 손짓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오래 멈추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초대는 철회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긴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기도를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드셨다면 — 그것이 이미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릎 꿇고 30분을 채우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라고 한 마디 부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니, 그마저도 안 된다면 — 오늘 밤 잠들기 전, 야곱처럼 돌베개 위에 쓰러진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침묵도 읽으시는 분이니까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데살로니가전서 5:17
이 구절은 “24시간 기도하지 않으면 불합격”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의 자리를 아예 닫아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문을 꼭 닫지는 마십시오. 살짝 열어두기만 해도 됩니다. 바람은 하나님이 불어넣으십니다.
기도를 멈추면 뭔가 잃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네, 잃습니다. 하나님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누리는 것을 잃습니다. 그러나 그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는 아직 열려 있고, 아버지는 여전히 기다리고 계시고, 당신이 부르기도 전에 먼저 “이리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의무가 아닙니다. 그리움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그리워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당신을 그리워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