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은 하나님의 심판인가 — 자연악의 신학

지진은 하나님의 심판인가 — 자연악의 신학

#변증#자연악#섭리론#고통

— 피조물의 탄식, 그리고 그 탄식 너머의 소망


뉴스 속보가 멈춘 자리에서

2004년 인도양 쓰나미는 23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은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태어나자마자 유전 질환으로 고통받는 아이가 있고, 어제까지 건강하던 사람이 오늘 암 진단을 받는다.

이 고통에는 범인이 없다. 누군가의 악한 의지가 지진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덕적 실패가 암세포를 만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설명할 수 있는 도덕적 악과 달리, 이 비인격적 고통 — 신학에서 ‘자연악(natural evil)‘이라 부르는 것 — 은 더 깊고 더 당혹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이 이 세계를 만드셨다면, 왜 이 세계의 자연 자체가 인간을 해치는가?

자유의지 방어는 여기서 작동하지 않는다. 지진판의 이동에 자유의지는 없다. 바이러스의 변이에 도덕적 선택은 없다. 그래서 자연악은 악의 문제 중에서도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다.

이 글은 그 칼날을 회피하지 않는다. 대신, 성경이 열어주는 시야 — 타락과 자연의 관계, 섭리 속에서 자연악이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피조물 전체의 회복이라는 종말론적 소망 — 를 따라 걸어가 보겠다.


1. 태초에 자연은 좋았다

성경의 창조 서사는 하나의 후렴구를 반복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창세기 1:31

‘심히 좋았다(טוֹב מְאֹד, tov me’od)‘는 단순한 기능적 평가가 아니다. 이것은 미적이고 도덕적인 선언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 물리법칙, 지질 구조, 생태계 전체를 포함하여 — 본래 조화롭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 출발점이 중요하다. 자연악은 창조의 원래 설계가 아니다. 지진이나 질병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선언하신 세계의 본래적 특성이 아니라, 그 이후에 무언가가 깨졌다는 신호다.


2. 타락 — 자연이 함께 무너지다

개혁주의 신학이 자연악을 이해하는 열쇠는 아담의 타락이 인간만의 사건이 아니었다는 인식에 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선언하셨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덧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 창세기 3:17-18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자연 자체의 질서가 변형되었다는 선언이다. 아담은 온 피조물의 머리로서 하나님 앞에 섰고, 그의 타락은 그가 대표하는 피조물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연대적 결과를 이렇게 정리한다.

“그들은 인류의 뿌리였으며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모든 후손을 대표하는 자들이었으므로, 이 죄의 죄책은 그들로부터 자연적으로 태어난 모든 후손에게 전가되었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장 3항

아담의 대표성은 인류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온 땅을 다스리는 청지기 직분을 맡기셨다(창 1:28). 아담은 피조 세계의 대표자였고, 그의 불순종은 그가 다스리도록 위임받은 세계 전체를 타락의 결과 아래 두었다. 마치 한 나라의 왕이 반역하면 그 왕국 전체가 전쟁의 참화에 빠지듯, 인류의 머리가 반역하자 피조 세계 전체가 흔들린 것이다.


3. 피조물의 탄식 — 로마서 8:19-22

바울 사도는 이 진리를 가장 깊이 있게 전개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 로마서 8:19-22

이 네 절은 자연악의 신학을 응축하고 있다. 하나씩 풀어보자.

첫째, 피조물은 ‘허무한 데 굴복’해 있다. ‘허무(ματαιότης, mataiotēs)‘는 전도서의 ‘헛되다(הֶבֶל, hevel)‘와 같은 뿌리의 개념이다. 피조 세계는 본래의 목적 —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질서 — 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지진과 쓰나미, 암세포의 무자비한 증식, 바이러스의 치명적 변이 — 이 모든 것은 창조 질서가 ‘허무’에 종속된 증상들이다.

둘째, 이것은 피조물 자신의 뜻이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타락을 선택하지 않았다. 바울은 ‘굴복하게 하시는 이(τὸν ὑποτάξαντα)‘를 언급한다. 대부분의 개혁주의 주석가들은 이를 하나님으로 본다 — 아담의 타락에 대한 심판으로서,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허무 아래 두셨다는 것이다.

셋째, 이 굴복에는 소망이 내장되어 있다. ‘그 바라는 것은…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의 현재 상태는 최종적이지 않다.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해산의 고통과 같은 소망의 탄식이다. 산모의 진통이 새 생명을 향한 고통이듯, 피조물의 탄식은 새 창조를 향한 고통이다.

넷째, 이 해방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과 연결되어 있다. 피조물의 회복은 인간의 환경 보존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이라는 종말론적 사건과 연동되어 있다. 인간이 회복될 때, 인간이 대표하는 피조 세계도 함께 회복된다.


4. 자연재해는 하나님의 심판인가?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인가?” 어떤 이들은 특정 지역의 지진이나 전염병을 특정 집단의 죄에 대한 직접적 징벌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과론을 정면으로 부정하셨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누가복음 13:4-5

여기서 예수님의 논리를 주의 깊게 따라가야 한다.

부정하신 것: 실로암 망대 사고의 피해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라는 직접적 인과론. 긍정하신 것: 모든 인간은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보편적 진리.

이것은 자연재해가 하나님의 섭리와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특정 재난을 특정 죄에 대한 직접적 징벌로 읽는 것 — 이것은 욥의 친구들이 범한 바로 그 오류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의 고통을 그의 죄에 대한 징벌로 해석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해석을 “옳지 않다”고 판결하셨다(욥 42:7).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섭리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그의 전능하시고 언제나 현존하시는 능력으로 지탱하시고 다스리시며, 그래서 나뭇잎과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고 마시는 것, 건강과 질병, 부유함과 가난함 —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되시는 손에서 오는 것임을 뜻합니다.”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7문

비와 가뭄, 건강과 질병이 ‘아버지의 손에서’ 온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심판관의 철퇴가 아니라, 아버지의 손길이다. 섭리 안에서 질병과 재난은 특정 죄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타락한 세계 전체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일부다. 그리고 그 통치의 궁극적 방향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이다.


5. 그렇다면 자연악 앞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자연악이 타락의 결과라는 설명은 기원을 다루지만, 아직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지금 이 순간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은 놀라운 답을 준다: 하나님은 고통의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이시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자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 이사야 53:3-4

‘질고를 아는 자(אִישׁ מַכְאֹבוֹת, ish makh’ovot)’ — 문자 그대로 ‘고통에 정통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자연악의 한복판으로 오셨다. 그는 배고픔을 경험하셨고(마 4:2), 피곤에 지쳐 잠드셨으며(막 4:38), 땀이 피방울 같이 되는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눅 22:44).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 자연적 죽음의 가장 잔혹한 형태로.

기독교의 독특성은 여기에 있다. 다른 세계관은 고통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기독교는 고통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고통 한가운데 들어오신 하나님을 제시한다.


6. 욥의 대답 — 설명 대신 현존

자연악에 대한 가장 긴 성경적 탐구는 욥기다. 욥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욥 1:1). 그런데 그에게 자연악이 쏟아졌다 — 폭풍, 번개, 질병. 그의 친구들은 원인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욥 자신도 하나님께 답을 요구했다.

하나님의 응답은 38-41장에 걸쳐 펼쳐진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셨다. 대신 질문을 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 욥기 38:4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 욥기 38:28

“암사슴이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 욥기 39:1

이것은 침묵도 아니고, 거부도 아니다. 이것은 관점의 전환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왜’에 대한 이론적 답을 주시는 대신, 자신이 이 광대한 피조 세계를 얼마나 정밀하게 알고 돌보시는지를 보여주셨다. 비의 아버지가 되시고, 암사슴의 출산을 아시는 분이, 욥의 고통을 모를 리 없다.

욥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욥기 42:5

욥이 받은 것은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현존이 설명보다 더 깊은 답이 되었다.


7. 새 하늘과 새 땅 — 자연악의 종착점

자연악은 영원하지 않다. 성경은 자연악이 완전히 제거될 날을 약속한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 요한계시록 21:5

“그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요한계시록 21:4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 이것은 질병이 사라지고, 자연재해가 그치며, 피조물의 탄식이 기쁨으로 바뀌는 세계의 약속이다. 로마서 8장의 ‘피조물의 해방’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사야도 같은 비전을 노래한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 이사야 11:6-8

이것은 시적 과장이 아니라, 자연 질서의 근본적 갱신에 대한 예언이다. 포식과 피식, 독과 상해 — 타락 이후 자연 세계를 규정해 온 이 질서가 뒤집힌다. 헤르만 바빙크가 말한 대로,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회복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restaurat).” 새 창조는 자연의 폐기가 아니라 자연의 완성이다.


8. 그러므로 — 탄식하되, 소망 가운데

자연악의 문제를 정리하면 이렇다.

기원: 자연악은 하나님의 창조 설계가 아니라 아담의 타락의 결과다. 인류의 머리가 반역했을 때, 그가 대표하는 피조 세계 전체가 ‘허무에 굴복’하게 되었다.

현재: 하나님은 타락한 자연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섭리 가운데 다스리신다. 특정 재난을 특정 죄에 대한 직접적 징벌로 읽는 것은 욥의 친구들의 오류다. 그러나 모든 자연악은 이 세계가 회복이 필요함을 가리키는 표지판이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의 한복판에 들어오셨다.

미래: 피조물의 탄식은 해산의 고통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자연악은 완전히 제거되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땅은 흔들리고, 세포는 변이하며, 바이러스는 진화한다. 피조물은 탄식한다. 그러나 그 탄식은 절망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해산하는 어머니의 신음이다 — 새 생명을 향한, 새 세계를 향한, 새 창조를 향한 고통이다.

바울의 확신으로 마무리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로마서 8:28

‘모든 것’에는 지진도, 질병도, 쓰나미도 포함된다. 이것은 그것들이 그 자체로 선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피조 세계의 모든 탄식은 궁극적 선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그 궁극적 선의 이름은 새 창조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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