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어떤 사람이 길을 걷다가 쓰러져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고 하자.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이방인이 몸을 구부린다. 왜? 아이가 특별히 영리하거나 아름다워서인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한 사랑에서 나온 행위다.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선택도 이와 같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명기는 이 점을 놀랍도록 직설적으로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셨으니 곧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구하셨느니라.” — 신명기 7:7-8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이스라엘 선택의 이유는 이 한 문장에 담겨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조건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순전한 사랑.
공로 없이 받은 택함
이것이 왜 중요한가?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선택에 이유를 붙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뭔가 특별한 게 있었겠지”, “조상들이 경건했겠지”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생각을 여지 없이 무너뜨린다.
신명기 9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 신명기 9:6
“목이 곧은 백성.”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솔직한 평가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야곱은 형을 속였다. 그 아들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은 이십에 팔았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했다. 이들이 선택받은 자들이다.
이 역설이 은혜(grace)의 핵심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공로 때문에 선택받았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거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 주어진 사랑이기에 그것은 순전한 은혜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며 이 원리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 로마서 9:11-12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선도 악도 행하지 않은 때에 이미 선택이 이루어졌다. 선택은 행위 이전에 존재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라 부르는 교리의 성경적 근거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인가 — 선택의 목적
선택의 근거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선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단지 특권을 누리기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 이미 목적을 명시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 창세기 12:1-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스라엘의 선택은 배타적 특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복을 독점하기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복을 전달하는 통로로 부름받았다.
이사야는 이것을 “증인”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 이사야 43:10-11
이스라엘은 우상이 난무하던 고대 근동 세계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 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어야 했다. 모세는 이 부르심을 민족들 앞에서의 지혜와 지식으로 표현하며, 이스라엘의 삶과 율법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반영하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 신명기 4:6-8
선택의 절정: 그리스도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부르심에 반복해서 실패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탄식을 이렇게 전한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 호세아 11:1
“내 아들을 불러냈거늘” — 그런데 그 아들은 하나님을 떠났다. 이 비극적 서사는 마태복음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된다. 마태는 예수님이 애굽에서 돌아오신 사건에서 이 호세아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마 2:15).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 그 역할을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선택의 최종 목적지였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궁극적 수신자를 밝힌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 갈라디아서 3:16
이스라엘 선택의 역사 전체는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메시아의 탄생 지반이었다. 로마서 9장 4-5절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이 궁극적으로 이 한 분을 낳기 위한 준비였음을 증언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 로마서 9:4-5
양자 됨, 영광, 언약들, 율법, 예배, 약속들, 조상들 — 이 모든 놀라운 특권이 마침내 한 이름 앞에서 완성된다: “그리스도.”
언약은 끊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어떤 관계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일부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완전히 “대체”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바울의 가르침을 단순화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 이 관계를 설명한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 가지 사이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 로마서 11:17-18
이방인 신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언약적 뿌리에 “접붙인” 자들이다. 새로운 나무가 아니다. 같은 뿌리에서 자라나는 가지들이다. 이스라엘에 주어진 표현들이 그대로 교회에 적용되는 것은 교회가 이스라엘의 역할을 빼앗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의 복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열방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5항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율법 시대에 이 은혜언약은 약속들, 예언들, 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양, 그리고 유대 민족에게 주어진 다른 모형들과 의식들을 통하여 집행되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은혜언약의 역사적 전개였다.
선택은 겸손과 파송이다
이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반응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첫째는 깊은 겸손이다. 우리가 복음을 들은 것, 교회에 속한 것, 신앙의 유산을 받은 것 —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이유 없는 사랑 앞에서 교만은 설 자리가 없다.
둘째는 파송 의식이다. 이스라엘이 “복의 통로”로 부름받았듯, 교회도 세상에 복이 되도록 부름받았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이 선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베드로전서 2:9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선택은 목적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해 부름받았다. 이스라엘이 고대 근동에서 유일신의 증인이 되어야 했듯, 교회는 오늘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이사야 43장 4절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울려 퍼진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 이사야 43:4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여김을 받은 우리. 그 사랑의 무게를 아는 사람은 그 사랑을 혼자 품을 수 없다. 이것이 이스라엘 선택의 신비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