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남부터 다른 조건 — 하나님은 왜 불공평하신가

태어남부터 다른 조건 — 하나님은 왜 불공평하신가

#변증#공의론#섭리론#불평등

— 같은 출발선에 세워달라는 외침, 그리고 다른 차원의 대답


1. 누구나 한 번쯤 묻는 질문

왜 어떤 아이는 풍요로운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아이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첫 울음을 터뜨리는가. 왜 어떤 사람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질병과 싸워야 하는가. 만약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격차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다. 정의에 대한 진지한 갈망이고,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정직한 외침이다. 성경은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공정함’이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든다.


2. 인간의 공정과 하나님의 정의

현대 사회가 말하는 공정(fairness)은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기회를 전제한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서야 하고, 같은 규칙이 적용되어야 하며, 결과의 차이는 오직 개인의 노력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인간 사회의 제도 설계에서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justice, 히브리어 츠다카 צְדָקָה)는 이 평면적 공정과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의 정의는 관계적 신실함이다. 창조주로서 피조물에게 신실하시고,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시며, 역사의 주관자로서 모든 것을 궁극적 선을 향해 이끄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다.

사도 바울은 이 차이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삭뿐 아니라 우리 조상 이삭에게서 한 아이를 가진 리브가에게도 그러하니라. 그 자녀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 로마서 9:10-12

이 구절은 불편하다. 야곱과 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런 행위도 하기 전에 이미 다른 경로가 정해졌다. 이것이 불공평하지 않은가?

바울은 이 당연한 반문을 예상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로마서 9:14-16

바울의 대답은 놀랍다. 그는 하나님의 행위를 인간의 공정 잣대로 변호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 자체의 전제를 뒤집는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빚진 것이 있는가? 만약 하나님이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다면, 누군가에게 베푸신 은혜는 ‘불공정’이 아니라 은혜 그 자체다.


3. 옹기장이와 진흙 — 창조주의 주권

바울은 더 강한 비유를 든다.

“이르되 질그릇 만드는 자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 로마서 9:21

이 비유는 현대인의 감수성에 거슬린다. 인간을 진흙에 비유하다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비유가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의 무가치함이 아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비대칭을 가리키는 것이다.

진흙은 옹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물을 자격이 없다. 이것은 인간을 모욕하는 말이 아니라, 피조물이 창조주를 심판할 수 없다는 근본적 질서를 확인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원리를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자기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의하여 일어나는 무슨 일이든지 자유롭게 그리고 변함없이 작정하셨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1절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하나님은 자의적인 독재자처럼 보인다.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4. 달란트 비유 — 다른 양, 같은 신실함

예수님께서 직접 이 문제를 다루신 비유가 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긴 것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 마태복음 25:14-15

세 종은 처음부터 다른 양을 받았다. 다섯, 둘, 하나. 여기에 설명은 없다. “각각 그 재능대로(κατὰ τὴν ἰδίαν δύναμιν)“라는 짧은 구절이 전부다. 주인은 왜 다르게 주었는지 해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유의 결말에서 결정적인 통찰이 드러난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 마태복음 25:21

다섯 달란트를 받아 다섯을 남긴 종과, 두 달란트를 받아 둘을 남긴 종이 똑같은 칭찬을 받는다. 심판의 기준은 절대적 성과가 아니라 맡겨진 것에 대한 신실함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 세상의 성과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기서 핵심이 드러난다. 인간의 공정 개념은 입력의 동등함에 집중한다. 같은 양을 받아야 공정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관계의 신실함에 집중한다. 다른 양을 받았어도, 그 안에서 신실하게 응답한 자에게 같은 기쁨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다.


5. 욥의 절규와 하나님의 응답

성경에서 이 문제를 가장 처절하게 다룬 사람은 욥이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었다. 재산, 자녀, 건강. 욥의 외침은 오늘날 불평등 앞에 분노하는 모든 사람의 외침과 맞닿아 있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히 행하시고 완력으로 나를 핍박하시나이다”
— 욥기 30:20-21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욥이 기대한 것과 전혀 달랐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겠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 욥기 38:4-5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으셨다. 대신 욥을 창조의 광활함 앞에 세우셨다. 이것은 회피가 아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 너는 전체를 볼 수 없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받는 조건의 차이를 ‘불공정’으로 판단하려면,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생애의 단편만 본다. 하나님은 역사의 전체를 보시고, 영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경륜하신다.


6. 은혜의 렌즈로 다시 보기

여기서 결정적 전환이 필요하다. ‘공정’의 잣대를 고집하면, 하나님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왜 어떤 사람에게 적게 주셨습니까?”가 아니라 **“왜 누구에게든 주셨습니까?”**다.

성경의 세계관에서,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에게 빚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로마서 3:23-24

만약 공정이 우리의 잣대라면, 공정한 결과는 모두에게 동등한 축복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등한 심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 대신 은혜를 베푸신다. 이 은혜는 평등하게 분배되는 급여가 아니다. 은혜는 본질적으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가 이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온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 마태복음 20:12-15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 한 마디가 핵심이다. 인간은 비교의 눈으로 본다. “저 사람은 한 시간 일하고 같은 삯을 받았다”고 분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다르다. 은혜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더 주셨다고 해서 나에게 빚진 것이 생기지 않는다.


7. 그렇다면 고통받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신학적 원리로 머무르면, 실제로 가난과 질병과 억압 속에 태어난 사람들의 고통이 추상화된다. 성경은 이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약한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향한 특별한 관심을 거듭 선언하신다.

“여호와는 나그네를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 시편 146:9

“압제를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시는 여호와”
— 시편 146:7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가 이 진리의 극치다. 하나님의 아들은 로마 제국의 변방, 가난한 목수의 집에, 짐승들이 먹는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하나님은 불평등의 꼭대기가 아니라 밑바닥으로 오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립보서 2:6-8

이것은 하나님이 불평등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이다. 하나님은 불평등을 관조하시는 분이 아니라, 불평등의 한복판에 들어오신 분이다.


8. 영원의 저울

인간의 생애를 이 세상의 70-80년으로 한정하면, 조건의 불평등은 견딜 수 없는 부조리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이 생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보이는 것을 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나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 고린도후서 4:17-18

바울이 이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이유는, 그가 매 맞고, 돌에 맞고, 파선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을 모르는 서재의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생의 고난을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 불렀다. 그의 시야가 영원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불평등한 조건은 영원의 관점에서 재평가된다. 하나님의 최종 심판은 태어난 조건이 아니라, 그 조건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살았는가를 기준으로 한다.


9.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세 겹이다.

첫째, 겸손이다.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없다. 욥기가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경륜을 인간의 공정 개념으로 재단하는 것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둘째, 신뢰다. 하나님은 자의적인 분이 아니시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이미 증명하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 로마서 8:32

셋째, 사명이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다른 조건을 주신 것은 방치가 아니라 부르심이다. 달란트 비유가 가르치는 것처럼, 문제는 얼마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받은 것으로 무엇을 했느냐다. 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되고, 적게 받은 자에게는 적은 것으로의 신실함이 요구된다.


마무리하며

“왜 불공평합니까?”라는 질문은 정당하다. 성경은 그 질문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 질문을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하나님의 정의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모든 사람에게, 다른 경로를 통해, 같은 은혜를 향해 나아갈 길을 여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의 극치는, 하나님 자신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십자가에서 드러났다.

태어날 때의 조건은 다르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자리에 선다 —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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