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질문, 가장 긴급한 대답
인류가 던진 모든 질문 중에서, 이것만큼 오래되고 이것만큼 무거운 질문은 없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가?
아니면 외로운 인간이 두려움과 무력감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거대한 환상인가?
이 물음 앞에서 19세기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신학은 인간학이다.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하늘에 투사한 것이 곧 신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신은 인류의 집단적 소원 충족이다.” 21세기의 유발 하라리는 종교를 ‘허구적 질서’로 분류하며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이 글은 그 도전에 정면으로 응답한다. 인간이 신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신이 인간을 만드셨는가 — 이 질문의 방향을 바로잡는 것에서 시작하겠다.
1. 왜 인간은 신을 생각하는가 — 물고기는 왜 물을 모르는가
첫 번째 단서는 바로 그 질문 자체에 있다.
왜 인간은 자기보다 큰 존재를 상정하는가? 왜 역사상 모든 문명에서 — 아마존 밀림의 부족이든, 아테네의 철학자든, 서울의 회사원이든 —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감각이 존재하는가?
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이 보편적 현상을 **신성의 감각(sensus divinitatis)**이라 불렀다. 이것은 교육으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각인된 원초적 인식이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이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 로마서 1:19-20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놀랍다. 하나님은 숨어 계신 것이 아니라 보이셨다.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억누르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면서 “물이 있나요?”라고 묻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
투사론은 이 보편적 현상을 ‘인간의 소망이 만들어낸 허구’로 설명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생긴다: 왜 그 소망이 있는가? 갈증이 있다면 물이 있고, 배고픔이 있다면 음식이 있다. 인간 안에 있는 초월을 향한 갈망 자체가, 그 갈망의 대상이 실재함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아닌가?
2. 세 가지 길 — 존재에서 존재자에게로
고전적 신존재 논증은 하나님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 그 존재의 근거를 따라가면 도달하게 되는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빙크가 『개혁교의학』에서 강조했듯이, 이 논증들은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 안에 있는 **신 인식(cognitio Dei insita)**을 명료하게 한다.
첫째 길: 우주는 왜 있는가 — 우주론적 논증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있는가?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형이상학의 근본 물음”이라 부른 것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우연적 존재’(contingent being)다 —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들이다. 이 책상, 이 별, 이 우주 자체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연적 존재들의 연쇄만으로는 존재 자체가 설명되지 않는다. A가 B 때문에 있고, B가 C 때문에 있다면, 이 사슬은 어딘가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필연적 존재(ens necessarium)**에 닿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한소급에 빠지고, 무한소급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 필연적 존재 —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기 안에 가진 존재 — 를 성경은 스스로 이렇게 부르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출애굽기 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이것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선언이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
둘째 길: 도덕은 어디서 오는가 — 도덕적 논증
인간이라면 누구나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문화마다 도덕의 구체적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도덕적 질서가 있다’는 감각 자체는 보편적이다. 무고한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것이 ‘나쁘다’는 데에 문화적 합의가 필요한가?
무신론은 이 도덕적 감각을 진화적 적응으로 설명하려 한다. 협력하는 집단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에 도덕 감각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치명적 간극이 있다. 진화는 **“무엇이 생존에 유리한가”**를 설명할 수 있지만, **“무엇이 옳은가”**라는 규범적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성경은 이 보편적 도덕 감각의 근원을 분명히 밝힌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로마서 2:14-15
양심은 내부에서 울리지만 그 입법자는 외부에 계신다.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도덕법은 도덕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지문이다.
셋째 길: 무한은 어디서 왔는가 — 존재론적 논증
안셀무스가 제기한 이 논증은 단순하면서도 깊다. 우리는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를 사유할 수 있다. 그런데 유한하고 제한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산출할 수 있는가?
결과는 원인보다 클 수 없다. 유한한 마음에서 무한의 관념이 자체 발생한다면, 이는 인과율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 무한의 관념은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어야 한다 — 즉, 무한자 자신이 유한한 인간의 마음에 자기 인식을 심어놓은 것이다.
3. 투사론의 자기 모순 — 거울은 누가 만들었는가
이제 투사론에 직접 응답할 차례다.
포이어바흐는 말했다: “인간이 자기 본성의 가장 좋은 부분을 하늘에 투사한 것이 신이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신은 무력한 인간이 만들어낸 아버지 환상이다.”
이 주장들은 처음에는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한 발짝만 더 들어가면, 이 주장들은 자기 자신을 무너뜨린다.
첫째, 발생적 오류(genetic fallacy)에 빠진다. 신앙의 심리적 기원을 설명한다고 해서 신앙의 진리 여부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어떤 수학자가 숫자에 집착하는 심리적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수학 정리가 거짓이 되는가? 아스피린이 두통을 완화하는 화학적 기전을 설명한다고 해서, 두통이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둘째, 투사론은 양날의 검이다. “모든 종교적 믿음은 심리적 투사”라는 주장이 참이라면, 이 논리는 무신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무신론자가 “하나님은 없다”고 믿는 것 역시 하나님 없는 세계에 대한 심리적 소망의 투사일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무신론을 낳았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설명력이 부족하다. 투사론은 인간이 왜 자기와 비슷한 신이 아니라 자기를 초월하는 거룩한 신을 상정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투사라면 인간은 자기를 닮은, 자기에게 관대한 신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정면으로 꾸짖으시고, 회개를 요구하시며,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구원하신다. 이것은 인간의 소망 충족과는 정반대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위는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 시편 14:1
성경은 무신론을 ‘지적 결론’이 아니라 ‘도덕적 어리석음’이라 진단한다. 이것은 모욕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 마음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정직한 진단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기 싫어서다.
4. 증명 너머의 만남 — 논증의 한계와 성령의 조명
여기서 한 가지 정직한 고백이 필요하다. 위에서 제시한 모든 논증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성경은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 로마서 1:18
‘막는다(suppress)‘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 억누르는 것이다. 이것이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의 한 양상이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을 향한 증거를 보면서도 그것을 왜곡하고 거부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가?
논증은 이성의 장벽을 제거하는 데 도구가 된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여는 것은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5절은 이렇게 고백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확신과 확증은 우리 마음 안에서 말씀으로, 또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부터 온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궁극적 확신도 마찬가지다. 논증이 길을 비추고, 성령이 눈을 여신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이 말한 바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 사도행전 17:28
바울이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한 이 말은 오늘도 유효하다. 우리는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문제는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의 무감각이다.
5. 하나님은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셨다 — 자신을 드러내셨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지 않는다. 창세기 1:1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1
여기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전제를 증명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오만이 아니라 당연함이다. 태양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듯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분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자신을 증명하시는 대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자연을 통해 — 하늘이 그의 영광을 선포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 시편 19:1-2
양심을 통해 — 마음에 새겨진 율법이 증거한다.
역사를 통해 —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선지자를 보내시고, 마침내 아들을 보내셨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뿐 아니라 자신의 성품 — 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사랑이신 분 — 을 드러내셨다.
닫는 말: 맛보아 알라
모든 논증을 다 듣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논증의 실패가 아니다. 마음의 문은 바깥에서 여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찾는 자에게 자신을 감추시는 분이 아니시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 예레미야 29:13
그리고 한 가지 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시편 34:8
꿀의 단맛을 모르는 사람에게 화학식을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다. 직접 맛보아야 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논증은 문 앞까지 데려다주지만, 문을 여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개념이 아니시다. 인간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금도 찾는 자를 기다리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