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사는 것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공정한가요?

착하게 사는 것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공정한가요?

#구원론#변증#이신칭의#은혜

“착하게 사는 사람이 천국에 못 가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요? 그게 공정한 겁니까?”

이 질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반감 중 하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 반감에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평생 남을 돕고 정직하게 산 사람보다, 죽기 직전에 믿었다는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 그것은 정말 공정한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다루기 위해, 우리는 세 가지를 정직하게 검토해야 한다. 첫째, 인간의 ‘착함’이란 정말 무엇인가. 둘째, 하나님의 ‘공정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셋째,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실제로 어떤 구조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착함’은 누구의 기준인가

우리가 누군가를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대개는 이런 것들이다 —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이웃을 돕는다, 정직하다, 예의 바르다. 한국 사회에서는 여기에 효도, 성실함, 사회적 책임감 같은 덕목이 추가된다.

이 기준들은 나쁘지 않다. 아니, 좋은 것들이다. 문제는 이 기준이 누구의 기준이냐는 것이다.

인간의 착함을 판단하는 기준이 인간 자신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살인하지 않았고, 도둑질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선하게 살았다고. 그러나 기준이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로마서 3:23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단순한 도덕적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함, 순수한 선함, 흠 없는 의로움이다. 이 기준 앞에서 인간의 “착함”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어지며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 이사야 64:6

“더러운 옷”이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원문(עִדִּים)은 실제로 극도로 불결한 상태를 묘사한다. 이사야는 이것을 인간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의로운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최선의 선행조차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는 이 지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선행이 아무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선행은 분명히 가치가 있고, 세상을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으로 서는 것 —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착한 사람이 빠지는 가장 위험한 착각

여기서 우리가 직면해야 할 불편한 진실이 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본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의사에게 가서 “저는 건강합니다”라고 주장하는 환자를 생각해 보라. 겉으로는 괜찮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혈액 검사를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간의 도덕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는 ‘착한 사람’이지만, 마음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그 풍경은 전혀 다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 예레미야 17:9

가장 착한 행위도 들여다보면 복잡한 동기가 뒤섞여 있다. 남을 도울 때, 거기에는 순수한 사랑만 있는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 우월감, 자기 만족, 혹은 죄책감의 보상 — 이런 것들이 섞여 있지 않은가? 이것은 냉소가 아니라 정직한 자기 성찰이다.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은 인간이 가능한 한 최악의 상태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 존재의 모든 부분 — 지성, 감정, 의지, 양심 — 이 죄의 영향 아래 있다는 뜻이다. 깨끗한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물 전체가 변색된다. 어떤 부분은 더 진하고 어떤 부분은 덜하지만, 오염되지 않은 부분은 없다.

그래서 문제는 이것이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이지, 본질의 차이가 아니다. 둘 다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 시험에서 30점 맞은 학생과 80점 맞은 학생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합격 기준이 100점이라면 둘 다 동일하게 불합격이다.


공정함을 따진다면

이제 핵심 질문으로 가자.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은 공정한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진짜 공정함이 무엇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순전히 공정하기만 하시다면 — 인간의 행위에 정확히 합당한 대가를 치르신다면 — 그 결과는 어떤가? 바울은 이미 답을 내렸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 — 이것이 순수한 공정이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면, 공정한 결과는 모든 인간의 멸망이다.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러므로 “이신칭의가 불공정하다”는 항의는 역설적이다. 공정함을 요구하는 순간, 그 공정함은 항의하는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공정이 아니라 자비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십자가: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정함을 포기하신 것인가? 결코 아니다. 여기서 복음의 놀라운 논리가 드러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 로마서 3:23-26

이 구절은 기독교 구원론의 심장부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이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하셨다고 선언한다. “자기도 의로우시며(공의를 지키시며)” 그리고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죄인을 구원하심).”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십자가에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은 공정함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죄의 대가를 정확하게 치르셨다 — 다만 그 대가를 죄인 대신 자기 아들이 지불하게 하셨다. 이것은 공의의 포기가 아니라 공의의 완전한 충족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고린도후서 5:21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이중 전가(double imputation)**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재판에서 무죄가 선언된 것이 아니다. 유죄 판결의 형벌을 다른 분이 대신 받으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장 3항은 이것을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순종과 죽음으로써 그들이 이같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모든 사람의 빚을 온전히 갚으시고 합당하고 참되고 충분한 속죄를 그들의 아버지께 드리셨다.”

그러므로 이신칭의는 공정함의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공정함이 충족된 후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렇다면 착하게 사는 것은 의미 없는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오해가 있다.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면, 행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야고보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야고보서 2:14, 26

이 구절은 바울의 이신칭의와 모순되는가? 전혀 아니다. 바울과 야고보는 같은 진리의 다른 면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묻는 질문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가?” 답: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야고보가 묻는 질문은: “참된 믿음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답: 열매인 행위로.

나무와 열매의 비유가 이것을 명확히 해 준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 마태복음 7:17-18

열매가 나무를 좋은 나무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좋은 나무이기 때문에 좋은 열매가 나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한 행위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선한 행위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에베소서 2:10

이 구절은 바로 앞의 유명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에베소서 2:8-9) 직후에 나온다. 은혜로 구원받은 것(8-9절)과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은 것(10절)은 분리할 수 없다. 구원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다.


은혜란 무엇인가 — 그것이 왜 복음의 핵심인가

“착하게 사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은혜를 은혜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 로마서 11:6

은혜(χάρις, charis)의 본질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만약 착한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라면, 구원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 보수(wages)가 된다. 그리고 보수라면, 받을 자격이 있는 자만 받게 된다. 그런데 앞서 확인했듯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자격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은혜가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는데도 받는 것. 이것이 불공정한가? 채무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을 때, 채권자가 그 빚을 직접 갚아주고 자유를 선언한다면 — 이것을 불공정이라고 할 사람이 있는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60문은 이 진리를 아름답게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됩니다. 곧 내 양심이 나를 고발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무겁게 범하였고 그 어느 계명도 지키지 못하였으며 아직도 온갖 악에 기울어져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보상과 의와 거룩을 내게 주시고 돌리셔서, 마치 내가 일찍이 아무 죄도 짓지 아니하고 범하지 아니한 것 같이,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이루신 모든 순종을 내가 친히 갖추어 이룬 것 같이 여기시는 것입니다. 다만 이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진짜 불공정은 어디에 있는가

이제 처음 질문을 뒤집어 보자.

“착하게 사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체계가 정말 공정한가? 오히려 그 체계야말로 깊은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능력의 불평등이 있다. 어떤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선행을 실천하기 쉽고, 어떤 사람은 폭력과 가난 속에서 태어나 도덕적으로 살기가 극도로 어렵다. 행위로 구원이 결정된다면, 출발선이 다른 경주에서 같은 결과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불공정하지 않은가?

둘째, ‘충분한 착함’의 기준이 없다. 얼마나 착해야 충분한가? 51%? 70%? 99%? 행위 구원론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래서 결국 불안과 두려움의 종교가 된다 — “내가 충분히 착했는가?”라는 끝없는 자기 검열.

셋째, 착함은 교만을 낳는다. 자기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게 된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정확히 짚으셨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 누가복음 18:9-14

바리새인은 객관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율법을 지켰다. 세리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경멸받는 부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신다. 왜? 세리는 자기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착하게 사는 것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정확히 표현하면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착하게 사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다.

믿음은 착함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은 참된 착함의 유일한 뿌리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맛본 사람은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지 않고,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이웃을 사랑한다. 은혜를 알기에 겸손하고, 용서받았기에 용서하며, 사랑받았기에 사랑한다.

이신칭의는 불공정한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공의를 완전히 충족시킨 후에 주어지는 자비다. 그리고 이 자비는 누구든 —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많이 배운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열려 있다.

이것이 불공정인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공정한 불공정, 곧 은혜다.

“그런즉 이것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리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로마서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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