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길은 산꼭대기로 통한다”는 말이 정말 친절한 말일까?
1. 불편한 선언
어떤 성경 구절은 현대인의 귀에 거슬린다. 그중에서도 이 말씀은 단연 첫손에 꼽힌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요한복음 14:6
한 길, 한 진리, 한 생명.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선언 앞에서 다원주의 시대의 양심은 즉각 반발한다. 수십억 인류가 제각기 신을 섬기는데, 오직 하나의 이름만이 구원에 이른다니 — 이것은 편협한 독선이 아닌가? 다른 종교의 진실한 구도자들을 모조리 심판대에 올리는 오만이 아닌가?
이 질문은 정직하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질문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봐야 비로소 복음이 왜 ‘좋은 소식’인지가 드러난다.
2. “모든 길은 같은 곳으로”라는 환상
종교다원주의의 전제는 단순하고 매력적이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 실재를 향한 서로 다른 경로이며, 어떤 길을 걷든 결국 같은 정상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존 힉(John Hick)은 이를 “종교적 경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 기독교를 중심에서 끌어내려 여러 종교 중 하나로 재배치하자는 제안이다.
이 주장은 관용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1분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관용은 표면적이다.
첫째, 각 종교가 말하는 ‘정상’이 다르다. 불교는 자아의 소멸(열반)을 말하고,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대한 복종(살람)을 말하며, 힌두교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합일을 말한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말한다. 이 목적지들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 자아가 소멸하면서 동시에 인격적 교제를 누릴 수는 없다.
둘째, 다원주의 자체가 배타적이다. “모든 종교는 동등하다”는 선언은, 자기 종교의 유일성을 고백하는 모든 신앙인을 ‘틀렸다’고 판정하는 또 하나의 절대적 주장이다. 관용의 탈을 쓴 또 다른 독단이다. 바빙크가 『개혁교의학』에서 날카롭게 지적한 것처럼,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종교의 핵심 주장을 무력화시킨다.
셋째, 진리에 “배타적”이라는 수식어는 이상하다. 2 더하기 2는 4다. 이것이 배타적인가?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이것이 편협한가? 진리는 본성상 대안을 배제한다. “모든 답이 동시에 맞다”는 말은 친절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다.
3. 배타성의 뿌리 —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기독교의 배타성은 오만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고백에서 나온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은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역사 속에 자신을 계시하신 인격적 존재다. 그리고 그 계시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한복음 3:16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인간의 종교적 노력에 맡기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길을 찾는 것은 인간의 과제가 아니다. 길이 인간을 찾아오셨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 제조 공장(fabricam idolorum)이다.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성육신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길은 없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사도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사도행전 4:12
이것은 한 어부의 개인 의견이 아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가 목숨을 걸고 한 고백이다. 그리고 이 고백의 근거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이다.
4. 십자가 — 배타성의 가장 깊은 증거
기독교의 배타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교리서가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이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 누가복음 22:42
만약 다른 길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잔을 마시게 하셨을까? 만약 진실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면 누구든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피땀을 흘리며 기도할 이유가 있었을까? 십자가는 다른 길이 없었다는 것의 가장 극적인 선언이다.
존 오웬은 이 논점을 더 깊이 파고든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의 구원을 확정적으로 성취한 사건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음 없이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그 죽음은 불필요한 잔인함이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유일하기 때문에 효과적이고, 효과적이기 때문에 확실하다.
바울은 이 논리를 이렇게 못 박는다: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갈라디아서 2:21
율법의 행위로도 안 되고, 종교적 성실성으로도 안 되고, 도덕적 선행으로도 안 된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배타적이라면, 십자가가 배타적인 것이다.
5. 그런데 — 이것이 왜 복음인가
여기서 결정적 전환이 일어난다. 배타성은 장벽이 아니다. 배타성이야말로 복음이 좋은 소식인 이유다.
만약 구원이 각 종교의 가르침을 성실히 이행하는 데 달려 있다면, 구원은 도덕적 엘리트의 특권이 된다. 불교의 팔정도를 완벽히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흠 없이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유교의 인의예지를 온전히 갖춘 군자가 역사상 몇이나 있었는가?
모든 종교가 구원에 이른다는 말은 결국,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어떤 길이 맞는지 모르니 아무 길이나 걸어보라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무책임이다.
반면, “오직 예수”는 이런 뜻이다: 구원은 당신의 성취에 달려 있지 않다. 당신이 길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당신에게 내려왔다. 당신이 충분히 선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당신 대신 선하셨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8-9
은혜(gratia)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구원의 문이 하나뿐이라는 것은, 그 문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자에게도, 문맹에게도, 성인에게도, 죄인에게도. 출발점은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빈손이다.
스펄전은 이 역설을 이렇게 설파했다: “복음의 문은 키 큰 자가 들어가지 못할 만큼 낮다. 모든 사람은 무릎을 꿇어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무릎을 꿇기만 하면 누구든 들어갈 수 있다.”
6. “듣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배타성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반문이 여기 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아마존 밀림의 원주민, 복음이 전해지기 전의 고대 문명인 — 그들은 기회조차 없이 심판받는가?
이 질문은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은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친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증거하셨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 로마서 1:20
자연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흔적(일반계시)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졌다. 문제는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주어진 빛마저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둘째, 심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온 땅의 심판장이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 창세기 18:25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중보할 때 던진 이 질문은,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공의롭다는 확신의 표현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유한한 인간이 재단할 수는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고백한다: “선택받은 자 중에 유아기에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령을 통해 중생된다”(10장 3항).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우리가 아는 일반적 수단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그러나 이 ‘여지’가 다원주의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성경이 분명히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태복음 28:19-20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운명에 대해 겸손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과, 복음 전파의 긴급성을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로이드존스가 힘주어 말한 것처럼,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 대한 질문이 우리의 전도 의무를 면제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긴급하게 만든다.”
7. 배타성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배타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어감 때문에 우리는 핵심을 놓친다. 의사가 환자에게 “이 약만 먹어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편협함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에 기초한 처방이다. 다른 약도 괜찮다고 말하는 의사가 친절한 것이 아니라, 환자의 생명에 무관심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통찰했다: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 방식은 하나님 사랑의 강도를 보여준다. 아들을 보내실 만큼의 사랑, 십자가에 내어주실 만큼의 사랑 — 그 사랑의 크기가 바로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처방이 극단적인 이유는 병이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죄는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며, 이 단절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요한일서 4:16a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요한일서 4:10
사랑이 먼저였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다. 그리고 그 사랑의 방법이 아들을 보내시는 것이었다면, 그 방법은 하나님의 지혜가 선택한 최선이다. 우리가 그 방법을 ‘배타적’이라고 불평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신의 선호를 앞세우는 것이다.
8. 좁은 문 앞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 이 이미지는 불안하게 들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좁은 문을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초대하신다. 문이 좁다는 것은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 자기 의(義)라는 짐,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교만의 짐, 모든 길은 다 통한다는 안이함의 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은 이것이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구원의 유일성은 구원의 확실성이다. 내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에 이 확신이 울려 퍼진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로마서 8:38-39
이것이 복음의 배타성이 주는 선물이다.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그 구원은 나의 변덕이나 실패에 의해 취소되지 않는다. 여러 길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불안 대신, 한 분이 나를 붙잡고 계시다는 확신. 이것이 좁은 문이 주는 가장 넓은 자유다.
나가며: 초대는 지금도 열려 있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벽이 아니라 문이다. 닫힌 문이 아니라 열린 문이다. 다만 그 문에는 이름이 있다 — 예수 그리스도.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요한계시록 3:20
“누구든지.” 이 단어를 놓치지 말자. 좁은 문은 특정 민족, 특정 문화, 특정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된다. 조건은 단 하나, 문을 여는 것이다.
이것이 배타적인가? 그렇다. 문은 하나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넓은 초대이기도 하다. 자격 심사가 없기 때문이다. 학벌도, 국적도, 도덕적 이력서도 필요 없다. 빈손으로, 빈 마음으로, 문 앞에 서기만 하면 된다.
좁은 문이 가장 넓은 초대다. 이것이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