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을 구하던 자리에서, 임재를 만나다
답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암 선고를 받은 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날, 아이가 고통 속에 울부짖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날 — 그날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정교한 논증이 아니었다. “왜?”라는 질문은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영혼의 비명이었다.
전능하고 선한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용하시는가? 이 질문에 대한 철학적 응답은 존재한다. 그러나 병원 복도에서, 장례식장에서, 한밤의 기도 속에서 그 답변은 종종 공허하게 들린다. 머리가 이해해도 가슴은 여전히 피를 흘리기 때문이다.
이 글은 논증의 언어가 아니라 고백의 언어로 쓴다. 고통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불렀던 사람들 — 욥, 시편 기자, 예레미야,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 위의 예수 — 그들의 경험 속에서 성경이 증거하는 위로의 실체를 찾아간다.
욥 — 침묵으로 대답하신 하나님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성경 자체가 그렇게 증언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 욥기 1:1
그런 욥에게 재앙이 쏟아졌다. 재산, 자녀, 건강 —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세 친구가 찾아와 말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인과응보의 논리, 우리가 본능적으로 의지하는 ‘공정한 세계’ 가설이다. 고통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고통받는 자의 잘못이라는 설명.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꾸짖으셨다.
“내가 너희에게 노함은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 욥기 42:7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행위를 인간의 도덕적 장부로 환원하려 했다. 선한 행위에는 보상, 악한 행위에는 처벌 — 이 단순한 도식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해 ‘옳지 못한’ 말이었다. 고통의 원인을 반드시 죄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계산 안에 가두는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욥에게 어떤 ‘답’을 주셨는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 욥기 38:4
놀랍게도 하나님은 욥의 “왜?”에 답하지 않으셨다.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시는 대신, 자기 자신을 보여주셨다.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창조의 경이를 펼쳐 보이시며, 욥이 모르는 세계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드러내셨다. 바다의 경계, 새벽별의 노래, 들짐승의 자유, 레비아단의 힘 — 이 모든 것은 “내 경륜은 네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선언이었다.
욥의 반응은 논쟁이 아니라 경배였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욥기 42:5
욥은 고통의 ‘이유’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고통의 ‘이유’ 너머에 있는 분 — 하나님 자신을 만났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고백하듯, 하나님의 작정은 “극히 지혜롭고 거룩하시며”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장 1절).
이것은 반지성적 태도가 아니다. 고통의 원인에 대한 탐구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그 탐구의 끝에서 만나는 것이 ‘설명’이 아니라 ‘인격’이라는 고백이다.
시편 — 울부짖음이 허락된 자리
성경은 고통 앞에서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다. 시편의 3분의 1 이상이 탄식시(lament psalms)다. 하나님 앞에서 울고, 항의하고, “어느 때까지입니까?”하고 부르짖는 것이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신앙의 표현임을 성경 자체가 보여준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내 영혼에 근심하고 내 마음에 종일 아파해야 하리이까” — 시편 13:1-2
다윗은 하나님을 의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확신 때문에 울부짖은 것이다. 듣지 않는 이에게는 외치지도 않는다. 시편의 탄식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에 불신이 아니라 신뢰의 가장 날것 그대로의 형태다.
이것이 스토아적 인내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스토아 철학은 고통 앞에서 감정을 끊으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분이다. 아니, 더 나아가 우리의 고통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다.
십자가 — 고통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기독교 신앙의 가장 파격적인 주장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하늘에서 답변을 내려보내시지 않았다. 직접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이사야 53:3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마태복음 27:46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시편 22편의 탄식을 그대로 외치셨다. 이것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고통 — 육체적 고문, 사회적 수치, 사랑하는 이들의 배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 — 을 실제로 경험하신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이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특히 그의 고난의 전 기간에 하나님의 진노, 곧 죄에 대한 저주를 온 인류를 대신하여 짊어지심으로써, 자신의 몸과 영혼으로 우리를 영원한 정죄에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얻어주셨습니다.”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37문
여기서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고통의 문제는 더 이상 “왜 하나님은 고통을 허용하시는가?”라는 추상적 질문에 머무르지 않는다. **“고통받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하나님이 고통 밖에 계시다면, 우리는 항의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통 안에 계시다면 — 아니, 가장 깊은 고통을 자발적으로 짊어지셨다면 —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악의 문제에 대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으로 악의 대가를 치르시며 악을 심판하시는 동시에 악의 희생자를 구원하시는 사건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한복음 3:16
고통의 답은 논증이 아니라 십자가다. 하나님은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시기 전에, 고통의 ‘한가운데’에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
고통이 빚어내는 것들
성경은 고통을 좋은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고통은 타락한 세계의 현실이며,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 안에서 고통은 뜻밖의 열매를 맺는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로마서 5:3-5
바울은 환난 자체를 즐거워하라는 것이 아니다. 환난이 성령 안에서 인내 → 연단 → 소망이라는 영적 성숙의 경로를 열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 자체의 선함이 아니라, 고통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고백이다.
야고보서도 같은 진리를 증언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야고보서 1:2-4
고통 속에서 성숙하는 신앙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종류의 깊이를 가진다. 모든 것이 순탄할 때의 신앙과, 밤이 깊어진 자리에서도 “그래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은 다르다. 후자가 더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는 전자가 아직 시험받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금은 불 속에서 정련된다. 성경이 자주 사용하는 이 비유는 고통이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임을 가리킨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 베드로전서 1:7
이것은 하나님이 고통을 즐기신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금을 정련하는 세공사는 금을 사랑하기에 불 속에 넣는 것이다. 불이 목적이 아니라 금이 목적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 너머에 있는 우리의 온전함이다.
고통받는 지체, 함께 아파하는 몸
성경이 제시하는 위로는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 공동체를 통해 실현된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나니.” — 고린도전서 12:26
교회는 고통받는 이에게 “하나님의 뜻이니 참으라”고 말하는 곳이 아니다. 함께 울고, 함께 짊어지고,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곳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썼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고린도후서 1:3-4
여기서 놀라운 경륜이 드러난다. 우리가 받은 고통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통로가 되고, 그 위로는 다시 고통받는 다른 이에게 흘러간다. 고통은 고립이 아니라 연대의 뿌리가 된다. 자신이 깊이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이의 아픔 앞에서 진정으로 함께할 수 없다. 고통은 — 역설적으로 — 공감의 능력을 열어준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종말론적 소망
성경은 고통이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이 세상은 이미(already) 그리스도의 승리 아래 있지만,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사이에 산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요한계시록 21:3-4
이것은 현실 도피적 ‘파이 인 더 스카이(pie in the sky)‘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확실한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음에서 일어나셨기 때문에, 죽음과 고통의 최종적 폐기는 소원(wish)이 아니라 선언(declaration)이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고린도전서 15:54-55
바울이 이 선언을 했을 때, 그는 감옥에 있었고, 매 맞았고, 파선당했고, 배고팠다. 고통이 없는 자리에서 한 말이 아니다. 고통의 한복판에서, 그 고통보다 더 확실한 미래를 선언한 것이다.
지금의 고통은 실재한다. 그것을 부정하면 거짓이 된다. 그러나 그 고통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마지막 말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 말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요한계시록 21:5)이다.
고통 앞에 서 있는 당신에게
만약 지금 고통 가운데 있다면, 이 글이 완벽한 답이 되지 못할 것을 안다. 욥도 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만났다.
성경은 고통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을 아신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신음할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 출애굽기 2:25(원문: “하나님이 아셨더라”)
하나님의 ‘아심’은 정보의 인지가 아니다. 관계적 참여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알고 계시면서 때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 안에 계신다. 다니엘서에서 세 청년이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 왕이 본 것은 세 사람이 아니라 네 번째 존재였다.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이 풀린 네 사람이 불 가운데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 다니엘 3:25
불 속에 함께 계신 분.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다. 고통을 없애주시기 전에, 고통 안에 함께 계신다.
셋째, 이 고통은 끝이 있다. 밤이 아무리 길어도 아침은 온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 시편 30:5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교실에서 강의하시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은 답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셨다.
그래서 고통 앞에서 믿음은 “나는 이유를 안다”가 아니라 **“나는 그분을 안다”**가 된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어도, 그분이 선하시다는 것을, 그분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그분이 끝까지 이끄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 이것이 고통 한복판에서의 신앙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시편 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