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권력은 왜 처벌받지 않는가

교회 권력은 왜 처벌받지 않는가

#교회#권징#한국교회#공의

당신의 분노는 정당하다.

목사가 성도를 성적으로 착취했다. 교회 재정이 한 사람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갔다. 피해자가 입을 열자 “기도로 해결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가해자는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강단에 섰고, 피해자는 교회를 떠났다. 아니, 쫓겨났다.

이것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사람의 양심을 의심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당신이 보고 분노한 그것 —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권력 구조다. 그리고 성경은 그 구조에 대해 당신보다 더 거칠게 말한다.


성경은 침묵하지 않았다

교회 지도자의 범죄 앞에서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용서하라”만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읽어보라.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 — 디모데전서 5:20

‘모든 사람 앞에서.’ 비공개 합의가 아니다. 조용한 사임이 아니다. 공개적 책망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 지도자가 죄를 범했을 때 덮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드러내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전서 5:5

고린도 교회에 성적 범죄자가 있었을 때, 바울의 지시는 분명했다. 내보내라. 교회 안에 두지 마라. 이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한 길이라고 했다. 지금 한국 교회가 하는 것과 정반대다. 한국 교회는 가해자를 안에 두고 피해자를 내보낸다.

구약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거짓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을 보라.

“그 두령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들은 삯을 위하여 가르치며 그 선지자들은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 미가 3:11

돈을 위해 가르치고, 뇌물을 위해 재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말하는 자들. 3천 년 전 예언자의 고발이 오늘 한국 교회 뉴스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가

한국 교회에서 목사의 범죄가 처벌받지 않는 구조에는 명확한 원인이 있다.

첫째, 목사직이 우상이 되었다. 개신교는 본래 만인제사장주의를 선언하며 시작했다. 목사는 성도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성도 가운데서 봉사하는 자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 마가복음 10:43-44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원칙을 뒤집었다. 복수 장로가 함께 다스리는 체제를 포기하고, 한 사람에게 인사권·재정권·설교권을 모두 집중시켰다. 목사가 곧 교회가 되었다. 이것은 장로교 정치 체제의 붕괴이며, 성경이 경고하는 거짓 권위 구조의 부활이다. 목사를 하나님의 특별한 대리인으로 여기는 순간, 그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하나님께 대드는 일’이 된다.

둘째, 권징(치리)이 사라졌다. 개혁교회는 본래 세 가지 표지를 가진다 — 말씀의 바른 선포, 성례의 바른 시행, 그리고 권징의 바른 시행. 세 번째가 사라졌다. 범죄한 지도자를 재판하고, 직분에서 면하고, 필요하면 출교하는 제도가 유명무실해졌다. 교단 재판은 서로 봐주기가 되었고, 가해자의 ‘회개’만으로 복직이 허용되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지, 직분 복귀의 조건이 아니다.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가 회개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다시 강단에 설 자격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셋째, “은혜”라는 말이 방패로 쓰인다. “교회는 죄인의 모임이니까” — 이 말은 본래 겸손의 고백이다. 우리 모두가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자기 인식. 그러나 이 말이 가해자를 감싸는 데 쓰일 때, 은혜는 값싸진다. 사도 바울은 이미 이 논리를 정면으로 차단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 로마서 6:1-2

은혜를 말하면서 정의를 외면하는 것은 은혜의 오용이 아니라 은혜의 배반이다.


”기도로 해결하라”는 말에 대하여

피해자가 신고하려 할 때 “기도로 해결하라”고 말하는 것은 영적 조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범죄를 은폐하는 행위다.

성경은 국가의 사법 권한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 로마서 13:4

국가 권력도 하나님이 세우셨다. 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국가에 위임된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가 사법 기관의 개입을 막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 법정보다 더 엄격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 법정보다 더 관대하다 — 가해자에게만. 이것이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침묵하는 자들에게

이 문제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은 가해자 다음으로 침묵하는 자들에게 있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장로, 소문을 들었지만 확인하지 않는 성도, “교회의 명예”를 위해 덮자고 하는 사람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 에베소서 5:11

성경에는 침묵의 대가를 치른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제사장 엘리는 자기 아들들이 성전에서 악행을 저질렀을 때 금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히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르리니 이는 그가 아는 죄악을 인하여 그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사무엘상 3:13

묵인은 방관이 아니다. 공모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조적 문제에는 구조적 해법이 필요하다.

하나,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의 복직을 원천 차단하는 교단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 회개는 영혼의 문제이고, 직분은 공적 신뢰의 문제다. 이 둘은 다르다.

, 교회 재정·인사에 대한 독립 감사 구조를 법제화해야 한다. 목사 한 사람이 돈과 사람을 모두 쥐는 구조에서는 부패가 필연이다.

, 피해자 보호를 의무화해야 한다. 신고한 피해자에 대한 보복 — 출교, 소문 유포, 2차 가해 — 을 교단 차원에서 제재해야 한다.

, 교회는 사법 기관의 수사를 막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요구가 아니다. 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를 떠난 당신에게, 혹은 교회를 경멸하는 당신에게 한 가지만 말하겠다.

당신의 분노는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도 분노하신다.

“공의를 물 같이, 정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 아모스 5:24

교회 권력의 범죄를 보고 분노하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 정의감 —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다. 문제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인간이다.

진짜 교회는 죄를 덮는 곳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는 곳이다. 빛 가운데 걷는 곳이다.

“만일 우리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요한일서 1:7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재정도, 권력도, 죄도. 그 빛을 두려워하는 교회는 이미 교회이기를 멈춘 것이다.

교회를 지키고 싶다면, 죄를 지키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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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