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오류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가

성경에 오류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가

#성경론#변증#무오성#해석학

어떤 사람은 성경을 펼치다가 멈춘다. 여호수아서에서 태양이 멈추었다는 대목, 창세기의 창조 순서가 현대 과학과 맞지 않는다는 느낌, 사무엘서와 역대기의 숫자가 서로 다른 대목. 그리고 조용히 책을 덮으며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왜 이런 것들이 있는 거지?”

이 질문은 불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진지하게 읽으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주치는 정직한 질문이다. 교회가 이 질문 앞에서 “그냥 믿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믿음이 아니라 맹목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성경 자체가 그런 맹목을 요구한 적이 없다.

이 글은 그 정직한 질문과 함께 걸어가 보려는 시도다.


1. 무오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하나님이 저자의 손을 잡고 한 글자 한 글자 받아쓰기를 시킨 것, 마치 팩스 기계처럼 오류 없는 문서가 전송된 것.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스스로 증거하는 영감의 방식이 아니다.

성경의 영감은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이다. 성령께서 인간 저자의 인격, 성품, 문체, 교육 수준, 역사적 상황을 모두 사용하시되, 그 과정 전체를 주관하셔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를 정확히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바울의 서신은 바울의 성격이 묻어나고, 아모스의 언어는 시골 목자의 어휘가 드러나며, 누가의 기록은 의사 출신 역사가의 정밀함이 돋보인다. 이것은 결함이 아니라 설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8항은 이렇게 고백한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이 원문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과 섭리에 의해 모든 세대에 걸쳐 순수하게 보존되었으므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을 주목하라. 무오성은 **원본(autographa)**에 대한 고백이다. 수천 년에 걸친 필사 과정에서 미세한 필사 오류가 생겼다는 사실은 교회가 언제나 인정해왔다. 그러나 필사 오류가 있다는 것과 원본에 오류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이다. 또한 현대 본문비평학은 수천 개의 사본을 비교하여 원본에 극히 가까운 본문을 복원해냈으며, 교리적으로 중요한 본문에서 불확실성이 남은 경우는 사실상 없다.

그렇다면 무오성의 올바른 정의는 무엇인가? 성경은 원래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든 것을 참되고 신뢰할 수 있게 가르친다. 이것은 성경이 현대 과학 교과서의 정밀도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성경 자체의 방식으로, 오류 없이 전달한다는 뜻이다.


2.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 그러나 과학과 적대하지도 않는다

“해가 땅 위에서 멈추었다”(여호수아 10:13). “해가 뜨는 데서부터 해가 지는 데까지”(시편 113:3). 이런 표현이 지동설과 모순되는가?

잠시 오늘 아침 뉴스를 떠올려보라. “오늘 일출 시각은 6시 12분입니다.” 이 표현을 듣고 “기상청은 천동설을 믿는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현상적 언어(phenomenological language)다 — 인간의 관찰 시점에서, 인간의 일상 언어로 현상을 묘사하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우주의 물리적 구조를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시편 기자의 말을 들어보자: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함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있나이다” — 시편 119:89-90

시편 기자에게 “땅을 세우셨다”는 표현은 지구가 기둥 위에 물리적으로 놓여 있다는 우주론적 진술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만물을 지탱하신다는 신학적 선언이다. 장르를 무시하고 시를 과학 논문으로 읽으면, 모든 시인이 거짓말쟁이가 된다. “내 마음이 불타오른다”는 표현을 듣고 심장에 화염이 붙었다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실제로 과학 혁명을 이끈 인물들 대부분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 케플러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는 것”이 과학의 목적이라 했고, 뉴턴은 자연법칙의 배후에 있는 입법자를 고백했다. 그들은 성경과 과학이 두 개의 다른 책 — 하나님의 말씀의 책과 하나님의 창조의 책 — 이라고 이해했다. 두 책의 저자가 같으시니, 올바르게 읽으면 모순될 수 없다. 다만 각 책에는 그에 맞는 읽기 방법이 있을 뿐이다.


3. 장르를 무시하면 성경이 왜곡된다

성경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66권의 서고(library)다. 그 안에는 역사 서술, 시, 지혜문학, 예언, 묵시문학, 서신, 율법, 족보, 찬송, 애가가 있다. 각 장르에는 고유한 문학적 관습이 있으며, 그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 성경을 참되게 읽는 길이다.

역사 서사: 사무엘서, 열왕기서, 사도행전은 실제 사건을 기록한다. 그러나 역사 서술도 관점과 목적을 가진다. 사무엘서와 역대기가 같은 사건을 다르게 서술하는 것은 한쪽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각각 다른 독자에게 다른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재판에서 두 증인이 같은 사건을 다른 세부 사항으로 진술하면,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독립적 증언의 표지다.

시와 지혜문학: 시편, 아가서, 잠언은 문학적 장치를 자유롭게 사용한다. 과장법, 의인법, 병행법, 은유. “산들아 숫양 같이 뛰놀았도다”(시편 114:4)를 지질학적 보고서로 읽는 사람은 없다.

묵시문학: 다니엘서, 요한계시록은 상징과 환상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일곱 뿔과 일곱 눈”(계 5:6)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구약의 상징 체계 안에서 읽으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능력(뿔)과 전지(눈)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서신: 바울의 편지는 특정 교회의 특정 상황에 대한 응답이다. 그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한 구절만 떼어내면, 바울의 의도와 정반대의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장르를 존중하는 해석은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듣는 것이다. 편지를 시로 읽거나, 시를 과학 논문으로 읽는 것이야말로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4. 겉보기 모순 — 성경이 스스로 해명하는 것들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 보자. 성경에서 가장 자주 지적되는 “모순”들을 살펴보고, 그것이 실제 모순인지 아닌지를 성경 자체에서 답을 찾아보자.

사례 1: 사무엘하 24:1과 역대상 21:1 — 누가 다윗을 부추겼는가?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시니라” — 사무엘하 24: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 역대상 21:1

하나님이 했는가, 사탄이 했는가? 이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의 섭리론 안에서 보면, 이것은 같은 사건의 두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목적 안에서 사탄의 활동을 허용하셨다. 사탄은 자신의 악한 의도로 다윗을 충동했고,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더 큰 목적을 이루셨다.

이것은 욥기의 구조와 정확히 같다. 욥에게 고난이 닥친 것은 사탄의 손에서 나왔지만, 하나님의 허용 안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두 기록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피조물의 도구적 역할이라는 두 겹의 인과 구조를 보여준다.

사례 2: 유다의 죽음 — 매달렸는가, 떨어졌는가?

“이에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 마태복음 27:5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거꾸러져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으니” — 사도행전 1:18

마태는 목을 매었다고 하고, 사도행전은 떨어져서 배가 터졌다고 한다. 모순인가? 두 기록을 종합하면, 유다가 목을 맨 후 줄이 끊어지거나 나뭇가지가 부러져 아래로 떨어졌고, 이미 부패가 시작된 시신이 바위에 부딪혀 배가 터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태는 죽음의 원인(자살)을, 누가(사도행전의 저자)는 시신이 발견된 상태를 각각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기록이다.

사례 3: 숫자의 불일치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의 귀환 인구수가 일부 다르다. 이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고대 근동의 숫자 체계와 필사 관행을 고려해야 한다. 히브리어 숫자는 알파벳 문자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모양이 유사한 문자 간의 필사 오류가 가장 흔한 전사 오류(transmission error) 중 하나였다. 또한 두 목록이 작성된 시점이 다르면(출발 시점 vs. 도착 시점, 또는 서로 다른 등록 기준), 숫자가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러한 숫자 차이가 성경이 가르치는 어떤 교리도 변경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셨다는 역사적·신학적 메시지는 두 본문에서 동일하다.


5. 성경의 목적 — 무엇을 위한 책인가

이제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오자. 성경은 무엇을 위해 기록되었는가? 성경 자체가 이 질문에 답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 디모데후서 3:16-17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생물학 교과서가 아니고, 천문학 논문이 아니며, 고대사 백과사전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죄와 은혜와 구속의 이야기를 통해 알려주는 책이다.

이것은 성경이 역사적 사실을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 위에 서 있다 — 실제 역사 속에서 성육신하시고,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실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위에. 그러나 성경이 역사를 기록할 때도, 그 목적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넘어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고린도전서 15:3-4

“성경대로”라는 표현을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 사건인 동시에 성경이 처음부터 가리키고 있던 사건이다. 성경의 궁극적 초점은 그리스도이시다. 숫자가 하나 다른지, 시적 표현이 과학적 정밀도를 갖추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연애 편지를 받고 맞춤법을 검사하는 것과 같다. 편지가 말하는 것은 맞춤법이 아니라 사랑이다.


6. 의심은 적이 아니다 — 그러나 의심에 머무는 것은 위험하다

성경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불신앙은 아니다. 오히려 교회 역사를 보면, 가장 깊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정직한 질문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이원론을 거쳐 성경으로 돌아왔고, 루터는 “의로운 하나님”이라는 표현과 씨름하다가 복음을 재발견했다. 칼뱅은 인문주의적 훈련을 통해 원전을 정밀하게 읽는 법을 배운 후에야 성경의 깊이에 도달했다.

그러나 의심이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재판이 되면, 그것은 다른 문제다. 성경 앞에 심판관으로 앉아 “이 구절은 인정하고 저 구절은 거부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사실상 나의 이성이 성경 위에 놓인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동의하는 부분만 골라 읽는 것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자세는 이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잠언 3:5-6

이것은 이성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지, “네 명철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도구이지 재판관이 아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여 성경을 읽되,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성령의 조명 아래서 읽어야 한다.


7. 성경이 어렵다는 것은, 성경이 깊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자. 성경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 베드로후서 3:16

베드로 자신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성경의 결함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르는 것을 경고했다. 어려운 부분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거나, 어려운 부분 때문에 전체를 포기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

성경이 어렵다는 것은 성경이 깊다는 뜻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오후 한나절 독서로 완전히 파악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위대한 문학 작품도 평생을 읽어도 새로운 것이 발견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더 하겠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7항은 이 점을 아름답게 정리한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동일하게 명백하지는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분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지켜야 할 것들은, 성경의 이곳저곳에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학식 있는 자뿐 아니라 학식 없는 자라도 통상적인 수단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죄인이시며,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오직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 이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줄기 물처럼 명확하게 흐르고 있다.


나가며 —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은 모든 구절의 의미를 즉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미 명확하게 주어진 빛 위에 서서 걸어가는 것이다.

여기에 아름다운 역설이 있다. 성경이 인간 저자를 통해 기록되었다는 사실 — 목자의 거친 언어, 의사의 정밀한 기록, 포로의 눈물 젖은 탄식 — 이것은 성경의 약점이 아니라 성육신적 성격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를 입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셨듯이, 성경도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완전히 인간의 언어다.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에 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 확신을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며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 시편 19:7-8

성경은 완전하다. 그 완전함은 인간이 기대하는 방식의 완전함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과학적 정밀도의 완전함이 아니라, 영혼을 소성시키는 완전함이다. 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며,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는 완전함이다.

이 책이 당신의 질문에 모두 답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가리키시는 분 —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 은 모든 질문의 최종 답이시다. 성경의 어려운 부분 때문에 걸음을 멈추지 말라. 이미 분명하게 주어진 빛을 따라, 한 걸음 더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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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