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질문들은 불경한 것이 아니라 정직한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근거가 성경 자체라면, 그건 순환논리 아닌가?” “정경은 4세기 공의회에서 정치적으로 결정된 것 아닌가?” “수십 명이 수백 년에 걸쳐 쓰고, 수천 번 필사하면서 오류가 쌓였다면,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신앙을 공격하려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으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주치는 질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 질문 앞에서 도망치거나 분노할 것이 아니라, 겸손하되 확신 있게 답해야 한다.
이 글은 그 시도다.
1. 순환논리라는 오해 — 태양을 증명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성경이 권위 있다는 근거로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순환논리다.” 이 비판은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 비판이 전제하고 있는 것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비판은 성경보다 상위의 판단 기준이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이성이든, 과학이든, 역사적 검증이든 — 어떤 외부 기준이 성경의 권위를 승인하거나 기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자. 만약 어떤 외부 기준이 성경의 권위를 최종적으로 판단한다면, 그 순간 궁극적 권위는 성경이 아니라 그 외부 기준이 된다. 이것은 어떤 궁극적 권위이든 마찬가지다. 이성의 최종 근거는 이성 자체이고, 논리학의 기본 법칙은 논리학 외부에서 증명되지 않는다. 궁극적 권위가 자기 자신에게 호소하는 것은 순환논리의 오류가 아니라, 궁극적 권위의 본질적 속성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을 빌려 표현하면, “태양이 빛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태양보다 더 밝은 것을 가져올 수는 없다.” 태양을 보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밝은 광원이 아니라 눈을 뜨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맹목적 신앙 위에 서 있다는 뜻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5항은 이렇게 고백한다(저자 번역):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충분한 설득과 확신은,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성경과 함께 우리 마음속에서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부터 온다.”
여기서 핵심 구조를 주목하라.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은 두 층위로 이루어진다. 첫째, 외적 근거들(보조적 증거)이 있다 — 내용의 탁월성, 교리의 통일성, 문체의 위엄, 예언의 성취, 역사적 확인. 이것들은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정당한 근거다. 둘째, 궁극적 확신은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에서 온다. 성령이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영혼에 직접 확신을 심으신다.
이것은 “그냥 믿어라”가 아니다. 외적 근거가 이성적 장벽을 낮추고, 성령이 영혼의 눈을 여시는 것이다. 꿀이 달다는 것을 증명하는 궁극적 방법은 화학 분석이 아니라 맛보는 것이다. 그러나 화학 분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2. 정경은 정치적 결정이었는가 — 교회는 정경을 만들지 않았다
“성경 66권은 4세기 공의회에서 정치적으로 결정되었다.” 이 주장은 댄 브라운의 소설 이후 널리 퍼졌지만,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정경의 역사를 추적하면, 공의회 결정 이전에 이미 교회가 어떤 문서를 권위 있게 사용하고 있었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agment, 약 180년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경 목록 중 하나로, 신약 27권 중 대부분(약 22권 이상)을 이미 권위 있는 문서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니케아 공의회(325년)보다 150년 전이다. 2세기의 이레나이우스는 사복음서의 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글을 썼다. 사도 바울의 서신은 기록된 직후부터 여러 교회에서 회람되며 권위 있는 문서로 읽혔다. 베드로 자신이 바울의 서신을 “다른 성경”과 동등한 것으로 언급한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 베드로후서 3:16
그렇다면 4세기 공의회는 무엇을 한 것인가? 카르타고 공의회(397년)는 정경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가 2~3세기에 걸쳐 사용하고 인정해온 문서 목록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이것은 농부가 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라난 밀을 수확하는 것과 같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4항은 이 관계를 정확히 정리한다(저자 번역):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 그 저자에게 의존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교회가 성경에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다. 성경이 이미 가지고 있는 권위를 교회가 인식하고 증언한 것이다. 이 구분은 결정적이다. 권위의 원천은 하나님이시지, 교회가 아니다. 사실 역사의 순서를 보면, 성경이 교회를 낳은 것이지 교회가 성경을 낳은 것이 아니다.
3. 필사 오류가 있으니 신뢰할 수 없는가 — 숫자가 말해주는 것
“2,000년 동안 손으로 필사했으니 원본과 달라졌을 것이다.” 이 우려는 합리적이다. 실제로 신약 사본들 사이에는 수십만 개의 이문(異文, textual variants)이 존재한다. 이 숫자는 언뜻 충격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 숫자의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사본의 수가 압도적이다. 신약 그리스어 사본만 5,800여 개가 현존한다. 여기에 라틴어 번역 사본 10,000여 개, 기타 고대 번역 사본 수천 개를 더하면, 신약의 사본 증거는 고대 문헌 중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다. 참고로, 플라톤의 저작은 약 7개 사본, 헤로도토스의 역사서는 약 8개 사본이 전해진다. 이 고전들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둘째, 이문의 절대 다수는 사소하다. 철자 오류, 어순 차이, 관사 유무 — 이런 것들이 이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본문 비평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의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문은 전체의 극히 일부이며, 핵심 교리에 영향을 미치는 이문은 단 하나도 없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적 죽음, 부활, 칭의, 성화 — 이 모든 교리는 어떤 사본 전통을 따르든 동일하게 가르쳐진다.
셋째, 고고학은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을 지속적으로 확인해왔다. 한때 성경에만 등장하여 가공의 민족으로 의심받던 헷 족속(Hittites)은 20세기 초 고고학적 발굴로 그 실재가 확인되었다. 1961년 가이사랴에서 발견된 빌라도 석판은 본디오 빌라도의 역사적 실존을 증명했다. 1993년 발견된 텔 단 비문은 “다윗의 집”이라는 표현을 담고 있어, 다윗 왕조의 역사성을 뒷받침한다.
이 모든 증거를 종합하면, 성경은 고대 문헌 중 가장 풍부하게 보존되고, 가장 엄격하게 검증된 텍스트다.
4. 인간의 손으로 기록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는가 — 성육신의 유비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다뤄야 한다. 설령 사본이 잘 보존되었다 해도, 애초에 인간이 기록한 문서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가? 바울의 개인적 감정이 서신에 묻어나고, 누가는 역사가의 방법론으로 조사하여 기록했다고 고백하며, 시편에는 인간의 분노와 절망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이런 문서가 어떻게 신적 권위를 가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성경의 영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성경의 영감은 기계적 받아쓰기(mechanical dictation)가 아니다. 하나님이 저자들을 타자기처럼 사용하여 한 글자씩 불러주신 것이 아니다. 동시에, 성경이 단순히 종교적 천재들의 통찰을 모은 것도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양극단을 모두 거부하고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을 고백한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은 이 원리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 베드로후서 1:21
여기서 “감동하심을 받은”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φερόμενοι(페로메노이)는 **“운반되다”**라는 의미다. 배가 바람에 의해 운반되듯, 성경의 저자들은 성령에 의해 운반되었다. 그러나 배가 바람에 의해 운반될 때 배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저자들의 인격, 문체, 어휘, 경험이 소멸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바울답게, 요한은 요한답게 기록했다. 그러나 그 인간적 특성을 통하여 하나님이 정확히 의도하신 바를 전달하셨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가장 유용한 유비는 성육신(incarnation)이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시다. 칼케돈 공의회(451년)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혼합되지도 않고, 변화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고, 나뉘지도 않는다”고 고백했다. 성경도 이와 유사하다. 성경의 신적 특성(권위, 무오, 통일성)과 인간적 특성(문체, 시대적 배경, 장르적 다양성)은 혼합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 인간적 형식은 약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방식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것을 하나님의 겸비(condescendentie)라고 불렀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적 상황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 — 이것은 하나님의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다. 부모가 어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말하는 것이 부모의 무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겸손한 은혜다.
5. 40명, 1,500년, 하나의 서사 —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경의 신뢰성에 관한 가장 놀라운 증거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비판자들이 약점으로 지적하는 바로 그 사실에서 나온다. 성경은 약 40명의 저자가, 약 1,500년에 걸쳐, 세 대륙에서, 세 언어로 기록했다. 목동, 어부, 왕, 의사, 세리, 학자 — 이들의 교육 수준과 문화적 배경은 극도로 다양했다.
그런데 이 문서들을 모아놓으면, 하나의 일관된 서사가 흐른다. 창조 — 타락 — 구속 — 완성. 창세기의 원복음(창 3:15)에서 시작된 구속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언약, 모세의 율법, 다윗의 왕국을 거쳐,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점점 선명해지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그리고 그 성취는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나아간다.
이사야 53장은 이 통일성의 가장 극적인 사례 중 하나다. 기원전 약 700년에 기록된 이 예언은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이사야 53:5
이것은 700년 후 골고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놀라울 만큼 정확한 묘사다. 한 사람의 천재가 이것을 고안해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40명의 저자가 1,500년에 걸쳐 이 서사를 우연히 조율했다고? 인간적 설명은 이 현상 앞에서 무력하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성경의 권위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 요한복음 10:3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마태복음 5:18
그리스도 자신이 성경의 권위를 이토록 무조건적으로 확언하셨다면,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우리가 성경의 권위에 대해 그분보다 더 유보적일 이유가 있는가?
6. 권위를 타협하면 무엇이 남는가
마지막으로, 성경의 권위를 타협한 역사적 결과를 직시해야 한다.
19세기 이후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초자연적 요소를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처음에는 “문화적 제약을 감안해서” 시작했고, 다음에는 “신화적 요소를 벗겨내자”로 진행했고, 결국 “개인적 종교 경험만 남기자”에 이르렀다. 물론 교회의 침체에는 복합적인 사회적 원인들도 있지만, 성경의 권위에 대한 타협과 설교 능력의 소멸 사이의 상관관계는 부정하기 어렵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논리적인 것이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시대적 한계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 기준선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문화적 제약 → 신화적 요소 → 도덕적 불편함 → 주관적 취사선택 — 이 경사면에서 멈출 논리적 지점은 없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이렇게 선포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πᾶσα γραφή)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라. 일부가 아니라 전부다. 우리가 편한 부분만이 아니라, 불편한 부분까지도. 성경의 권위는 우리의 취사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에 근거한다.
결론을 대신하여 — 읽어보라, 맛보라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외적 근거들을 살펴보았다. 정경화의 역사, 사본의 보존, 고고학적 확인, 예언의 성취, 신학적 통일성. 이 근거들은 강력하고,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논증의 축적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의 눈을 여실 때 온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증언하듯: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히브리서 4:12
성경은 변호가 필요한 사자가 아니다. 우리 밖으로 풀어놓기만 하면 된다. 2,000년 동안 이 책은 제국을 변화시키고, 포로를 해방하고, 절망한 영혼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렇게 하고 있다.
질문이 있다면, 좋다. 그러나 질문만 하지 말고, 읽어보라. 논쟁하기 전에, 맛보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시편 34:8